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을 조율하며 ‘슈퍼 갑(甲)’으로 군림하던 그가 백악관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을(乙)’로 변신해 24일 서울 여의도 교직원공제회와 역삼동 과학기술인공제회를 잇따라 찾았다. 그가 이날 건넨 명함은 미국 사모펀드(PEF) 운용사 론그룹(Rhone Group) 고문. 한국 기관투자가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한국 ‘큰손’들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투자 유치를 위해 한국을 찾은 건 볼턴 전 보좌관만이 아니다. 지난 23일 한국경제신문이 개최한 글로벌 대체투자 콘퍼런스인 ‘ASK 2019’에는 미국 유럽 홍콩 등에서 날아온 부동산·인프라 운용사 20여 곳의 대표가 무대에 섰다. 많은 해외 펀드 운용사가 몰린 탓에 무대에 서는 업체를 선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글로벌 시장에 명함도 못 내밀던 한국 자본의 위상이 180도 바뀐 모습이다. 한 국내 투자은행(IB) 임원은 “불과 4~5년 전만 해도 한국 기관들이 만나달라고 하면 퇴짜를 놓기 일쑤였던 해외 간판 운용사들이 지금은 투자 유치를 위해 자주 한국으로 날아온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높아진 위상에 걸맞은 실력을 갖췄는지에 관한 의구심이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과 각종 공제회를 비롯해 생명·손해보험회사들이 앞다퉈 해외 대체투자를 늘리면서 해외 운용사의 펀드 투자가 급증했다. 저금리 기조로 자산 수익률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기관들이 운용사 이름만 보고 투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 공제회 최고투자책임자는 “대체투자 관련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해외 투자가 이뤄진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 자주 찾아오거나 사무소를 내는 해외 대체투자 운용사가 늘어난 배경에는 비교적 쉽게 출자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유럽 대도시 중심가 오피스빌딩에 대한 ‘투자 쏠림 현상’도 우려를 낳은 대목이다. 자체적인 선구안을 기르기보다 위탁 운용사의 ‘명성’에 기대다 보니 일시에 비슷한 투자처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해외 자산운용사의 한국계 임원은 “수익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손실 위험도 높다는 뜻이란 사실을 되새기며 해외 투자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 자본이 세계 무대에서 ‘호구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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