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슈뢰더 "통일된다고 바로 경제강국 되지는 않는다"

입력 2019-10-27 17:16   수정 2019-10-28 00:50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사진)는 “통일이 됐다고 순식간에 경제강국으로 올라서는 건 불가능하다”며 “한국이 초기 통일비용을 감내할 경제력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슈뢰더 전 총리는 지난 24일 독일 베를린 연방하원 전직 총리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독일은 지금까지 통일비용으로 2조유로(약 2610조원)를 지출했다”며 “북한은 옛 동독보다 경제가 훨씬 낙후돼 있어 더 많은 비용이 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인터뷰는 독일 통일로 이어진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11월 9일)을 앞두고 이뤄졌다.

슈뢰더 전 총리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을 이끌며 통일 이후 찾아온 경제위기를 정면돌파해 독일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남북한의 지속적인 교류가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북한 체제가 반인권·독재 국가라는 이유로 남한이 교류를 중단한다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며 “독일 통일도 당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 비핵화를 위해선 국제사회가 북한에 체제 보장을 약속하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북한과의 협상엔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함께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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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층·정당 이익보다 국가개혁이 우선
리더는 職 걸고 투쟁해야"


독일 통일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면서 시작됐다. 준비되지 않은 통일로 1990년대 독일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비용 저효율의 대명사였던 ‘독일병(病)’도 커졌다. 이를 극복하고 독일을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도약시킨 인물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다. 1998년 독일 총리에 오른 그는 2002년 ‘하르츠 개혁’을 이끌어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자신이 이끄는 사회민주당 지지층이었던 노동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개혁을 마무리지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연방하원 전직 총리실에서 만난 슈뢰더 전 총리는 “2005년 선거에선 졌지만 총리로서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민주주의 국가 리더라면 소속 정당과 지지층의 이익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달 9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됩니다.

“장벽 붕괴는 놀랍고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긴장완화 정책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었지만 장벽이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못했습니다. 장벽 붕괴 뒤에는 어떤 방식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지 논란이 됐죠. 서독이 동독을 편입해 신속한 통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그런 결정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통일비용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 동독은 동유럽권에서 가장 경제력이 앞선 국가였습니다. 그런데도 서독의 엄청난 공적 자금이 동독 인프라 분야 등에 투자됐습니다. 통일 후 지금까지 2조유로(약 2610조원)의 통일비용이 쓰였죠. 특히 통일비용으로 충당됐던 통일세에 대해서도 서독 국민 사이에서 불만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옛 동·서독 간 경제 격차가 존재하는 건 사실입니다. 다만 일부 옛 동독 지역의 인프라가 오히려 서독 지역보다 좋아지는 등 격차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남북한 간 평화경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북 간 평화가 정착되면 북한도 옛 동독과 비슷한 방식으로 재건될 것입니다. 통일한국이 독일을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국가 경제도 이익을 내기 위해선 투자가 필요합니다. 북한은 옛 동독보다 경제력이 훨씬 낙후돼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통일 당시 서독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한국도 초기 통일비용을 감내할 수 있을 경제력이 필요합니다. 통일이 됐다고 해서 순식간에 경제강국으로 올라서긴 힘듭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과연 핵을 포기할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김정은을 직접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김정은이 요구하는 건 북한 경제제재 해제와 체제 보장입니다. 국제사회가 체제 보장을 약속하고, 대신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봅니다.”

▷북한의 반인권·독재 체제를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통일은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독일 통일도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의 평화 조약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북한이 반인권·독재 국가라는 이유로 내버려두면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현실을 인정한 뒤 남북 교류를 더욱 확대해야 합니다. 북한과의 교류가 많아진다고 할지라도 한국이 북한에 영향을 받을 일은 결코 없습니다. 남북 교류를 통해 한국의 자유경제체제가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북한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입니다.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국제사회가 북한 체제 보장을 약속해 줘야 합니다. 물론 협상에는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북한과의 협상을 쉽게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정치인이 생각나네요.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외교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만나면 다음날 바로 딜(협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즈니스라면 그런 딜이 가능하지만 정치는 비즈니스와 다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두세 번 만났는데도 딜이 이뤄지지 않으니까 관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르츠개혁으로 독일 경제가 구조조정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2000년대 초반 정부와 기업, 노조가 모인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기업과 노조가 타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부가 나섰죠. 대대적인 구조개혁은 정부가 주도하는 톱다운 방식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당시 실업자 수만 50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국가 경제를 위해선 노동개혁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물론 기업과 노조를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합니다만 설득이 어렵다고 국가 개혁이라는 목표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도 노동개혁 관련 논란이 거셉니다.

“한국은 독일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쉽사리 조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리더는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지지층과 소속 정당의 이익보다 우선시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리더십이란 뭘까요. 리더는 직을 쉽사리 포기할 것이 아니라 직을 걸고 투쟁해야 합니다. 국가에 필요한 개혁이라면 지지층 표를 잃고 선거에서 떨어지는 리스크를 감당해서라도 추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 2005년 총선에서 패했습니다. 다만 근소한 차이였다는 점은 꼭 강조하고 싶네요.”

▷법인세 인하를 놓고도 논란이 거셉니다.

“조세의 기본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저소득자는 세금을 좀 덜어주고, 고소득자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담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왜 세금을 걷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도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업이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미래를 위한 투자엔 세제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은 수출 중심국가입니다. 미·중 무역분쟁은 한국과 독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죠. 신속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세계 정치를 하면서 전 세계에 심각한 파국이 초래되고 있으니까요. 다른 나라의 정상들이 합리적인 이성을 잃지 않고 대응해 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도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브렉시트는 역사상 영국 총리가 내린 결정 중 가장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영국 하원에서 의원들이 브렉시트 관련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치의 합리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브렉시트는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경제도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다만 영국 정부와 EU가 최근 합의한 브렉시트 합의안이 통과된다면 그나마 경제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슈뢰더 前 총리는

'하르츠개혁' 주도, 통일 후 사회 대통합
독일 번영 기초 닦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1944년 독일 니더작센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 졸업 후 인문계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철물점 점원으로 일했다. 이후 야간학교에 다니며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했다. 괴팅겐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1976년 하노버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젊은 시절부터 사회민주당원이었던 그는 1980년 연방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니더작센주 주의회 사민당 원내총무와 주 총리를 거친 후 1998년 사민당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 같은 해 총선에서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던 헬무트 콜 전 총리를 누르고 총리에 선출됐다.

그는 중도좌파 성향인 사민당 출신이지만 2000년대 초반 ‘아젠다 2010’의 일환으로 실시된 독일 노동개혁의 상징인 ‘하르츠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산하 위원회에서 아젠다를 선도한 폭스바겐 인사담당 책임자였던 페터 하르츠의 이름을 따 하르츠개혁이라고 부른다. 슈뢰더 전 총리는 2005년 총선에서 하르츠개혁의 여파로 기독교민주당의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에게 패해 세 번째 집권에 실패했다. 그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은 2009년 교육부와 한국경제신문사 주최로 열린 ‘글로벌 인재포럼 2009’에 기조연설자로 참석했다.

△1944년 출생
△1971년 괴팅겐대 법학과 졸업
△1978년 전국청년사민당 의장
△1986년 니더작센주 주의회 사민당 원내총무
△1990년 니더작센주 총리
△1998~2005년 독일 총리


베를린=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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