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性대결 대리 전쟁터 된 '82년생 김지영'

입력 2019-10-28 17:26   수정 2019-10-29 03:19

개봉 5일 만에 100만 명의 관객을 확보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싸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성(性) 대결’이 격화되고 있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책이 출간(2016년)됐을 때도 격렬한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왔다. 일부 남성 네티즌은 페미니즘 영화라며 테러 수준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지만 일부 여성 네티즌은 수차례 표를 사는 등 영화를 옹호하고 있다.

개봉 전부터 평점 테러

28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23일 개봉한 82년생 김지영은 개봉 첫 주 만에 누적 관객 수 112만 명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를 관람한 실 관람객 평점도 여성(9.57점)과 남성(9.41점) 모두 높았다. 그러나 개봉 전에는 여성이 약 10점을 준 데 반해 남성이 1점대 평점을 주는 등 성별 간 평점이 극명하게 갈렸다. 영화 속 명대사를 쓰는 코너에는 실제 명대사가 아니라 “하루종일 TV 보다 애 데리러 가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등 조롱하는 문구가 올라와 있다.

이 영화만 겪은 일은 아니다. 올 들어 ‘걸캅스’ ‘캡틴 마블’ 등 여성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이 일부 남성 네티즌에게 평점 테러를 당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에 대항해 여성들을 중심으로 영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표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지지하는 ‘영혼 보내기 운동’을 벌인다. 직장인 신모씨(31)는 “주말에 어머니와 82년생 김지영을 봤는데 이번주에 영혼 보내기 운동을 할 예정”이라며 “할머니부터 엄마, 딸까지 세대에 걸쳐 여성들이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영화였다”고 말했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반감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영화를 추천한 여성 연예인들에게까지 번졌다. 배우 정유미 씨는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악성 댓글(악플)에 시달렸다. 안정환 축구 해설위원의 아내 이혜원 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관람 후기를 올렸다가 악플을 받고 SNS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논란은 오프라인까지 확대된 모양새다. 최근 SNS에는 한 영화관의 82년생 김지영 포스터가 수차례 접힌 채 게시됐다는 사진이 올라왔다. 누군가 포스터를 훼손한 뒤 게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관 관계자는 “포스터가 처음부터 접혀 있었다”며 “정보 제공 차원에서 걸어놨고 즉시 영화사에 재요청해 다시 걸었다”고 해명했다.

성대결로 몰고가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영화 자체를 평가하지 않고 ‘성 대결’에만 집중하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영화는 소설에 비해 젠더 이슈를 담담하게 그린 ‘가족 드라마’인데 영화를 보지도 않고 비난하는 이야기가 많다”며 “여성의 서사를 그린 영화는 무조건 성대결로 연결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20~30대 젊은 남성 사이에서 이런 인식이 두드러지는 것에 대해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젊은 남성들은 이전 세대에 강했던 가부장제의 수혜를 누리지 못했고, 현재까지 생의 대부분을 보낸 학교에서 여학생들과 성적을 두고 경쟁한 만큼 남성이란 이유로 혜택을 받았다는 인식을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은 박탈감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과의 유대를 쉽게 느끼기 어렵다”며 “이런 문화가 여성,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 발언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유정/남정민 기자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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