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 예정국인 칠레가 30일 회의를 전격 취소했다. 대규모 시위 탓이다. 그동안 국제사회의 우려가 있을 때마다 칠레 정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시위가 국제회의 개최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다”고 부인해왔다.
칠레 시위는 정부가 지난 6일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을 800페소(약 1280원)에서 830페소(약 1330원)로 인상하면서 촉발됐다. 칠레 정부는 요금 인상안 철회를 시작으로 연금 인상 등 경제 대책을 잇따라 내놨다. 내무·경제·노동장관 등을 경질하고 내각의 3분의 1을 교체했지만 시위는 더 격화되는 분위기다. AP통신은 “시위 참가자들은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전했다. 지하철 요금이 30페소 오른 게 시위의 계기였지만, 시민들의 진짜 불만은 지난 30년간 겪은 고물가와 불평등 문제라는 얘기다. 칠레의 1인당 소득은 한국의 절반 정도지만 물가는 서울과 비슷하다.
칠레뿐 아니라 중남미와 중동에선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대부분 청년층이 주도하는 시위다. 초기엔 정부의 소액 세금 인상안이나 선거 결과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시작했으나 실업 해결과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로 커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은 청년 실업률이 25~30% 수준”이라며 “실업 문제가 이들 지역의 사회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29일 레바논에선 사드 하리리 총리가 사임했다. 지난 17일 반정부 시위가 시작한 지 12일 만이다. 레바논 시위는 정부가 레바논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스마트폰 메시지 앱(응용프로그램) 왓츠앱 이용자에게 하루 20센트(약 230원)를 과세하겠다고 발표한 게 도화선이 됐다. 만성적인 생활고와 취업난을 겪고 있는 시민들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레바논 전체 인구 4분의 1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레바논 정부는 지난 21일 과세안을 취소했다. 같은 날 고위 공무원 월급을 50% 삭감하는 등 긴급 경제개혁안도 발표했으나 시위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시위대는 실업 문제 해결과 부패 청산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 시위는 지난 1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시작돼 이라크 남부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시위대는 정부에 부패 청산, 실업 문제 해결, 수도·전기 등 공공서비스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볼리비아는 최근 세금 인상에다 정부의 대선 개표 조작 의혹이 겹쳐 시위가 커졌다. 대선 개표 방식에 반발한 야권 지지자를 중심으로 무기한 총파업도 벌어지고 있다. 산타크루스에선 대중교통 운행과 학교 수업이 중단됐다.
일부 국가에선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엔 이집트에서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례적으로 발생했다. 군인 출신인 엘시시 대통령은 2013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국가 비상사태 체제를 유지하며 사실상 시위를 금지하고 있다.
지난 4월엔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20년 장기 집권을 끝냈다. 당시 알제리 시위대는 정권 퇴진을 비롯 만성적인 실업 문제 해소, 기득권 부패 청산 등을 요구했다.
이들 시위는 실업 문제에 대한 청년들 불만이 누적돼 터진 것이라는 게 외신들 중론이다. CNN은 “최근 일어난 대규모 시위들은 지역·종교 간 갈등에 대한 것도 아니고, 독재 정권의 압제에 저항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며 “각국 청년들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라고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국가의 청년층(만 15~24세) 실업률은 대부분 세계 평균(12.7%)을 크게 웃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추산한 이라크의 올해 청년실업률은 16.5%다. 작년 이라크 정부가 자체 조사한 청년실업률은 25.6%에 달했다. 지난해 이라크 전체실업률(7.9%)보다 훨씬 높다. AP통신은 “이번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 남성”이라고 보도했다. 이집트(32.4%), 알제리(30.8%)는 청년층 실업자가 세 명 중 한 명 수준이다. 칠레(19.2%)와 레바논(17.6%)도 청년실업률이 높다.
앤서니 패프 미국 육군대 전략연구소 교수는 “이번 시위는 범위와 규모가 크고, 장기화하고 있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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