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미국 금융업계에서는 한 증권회사가 ‘수수료 전면 무료’를 선언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주인공은 미국 최대 온라인 증권거래업체인 찰스슈와브. 찰스슈와브는 건당 4.95달러(약 4800원)이던 주식·펀드 거래 수수료를 무료화했다. 찰스슈와브 측은 “우리 고객에게 가장 저렴하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찰스슈와브의 발표에 TD아메리트레이드 이트레이드 등 경쟁사들도 잇달아 무료 수수료를 채택했다.
찰스슈와브의 파격적인 선언 뒤에는 2008년 월터 베틴저 최고경영자(CEO) 취임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는 호실적이 자리잡고 있다.
찰스슈와브는 베틴저 CEO 아래에서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겨낸 미국 금융사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 1조달러에 그쳤던 찰스슈와브의 유치 자산은 현재 네 배 가까이로 증가한 3조8000억달러(약 4440조원)를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 찰스슈와브의 시가총액은 세 배 뛰었다.
22세에 연금 컨설팅 기업 햄튼 창업
베틴저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금융업에 관심을 뒀다. 고향인 오하이오주의 오하이오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베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사에 취직해 근무했다. 약 1년간 경험을 쌓은 뒤 22세에 연금 컨설팅기업인 햄튼을 창업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햄튼을 설립한 지 12년이 지난 1995년 회사가 찰스슈와브에 인수되면서 베틴저도 찰스슈와브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베틴저는 햄튼의 고객연금 계좌 대부분을 찰스슈와브를 통해 운용하고 있었고 어느새 찰스슈와브 최대 고객으로 부상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찰스슈와브는 햄튼에 관심을 뒀고, 사업성이 높다고 판단해 인수 결정을 내렸다. 찰스슈와브에서 9년 동안 연금부문장을 지낸 베틴저는 이후 회사 내 여러 부문을 두루 경험한 뒤 2008년 CEO에 올랐다.
베틴저가 CEO에 오르던 당시 찰스슈와브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전임 CEO인 데이비드 포트럭의 고(高)수수료 전략으로 고객들이 떠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 미국 금융업 전반이 흔들렸다. 굴지의 기업 주가가 하루 만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목격한 미국인들은 주식 투자를 꺼리게 됐다.
베틴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박리다매 전술을 활용했다. 고객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문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증권사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던 2008년에도 찰스슈와브는 매출이 증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거의 매년 매출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고객을 최우선의 가치로 보라”
베틴저는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고객을 최우선의 가치로 보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찰스슈와브는 동종 업계에서 순이익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베틴저는 과거 인터뷰에서 적은 순익 때문에 우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려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우리의 순익이 적다는 건 그만큼 고객에게 더 많은 수익이 돌아간다는 걸 의미한다”며 “그 덕분에 우리 회사를 찾는 고객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베틴저가 이런 경영 스타일을 고수하게 된 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 때문이다. 화학과 교수이던 베틴저의 아버지는 50대 초반에 자진 사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동료 교수들이 노조 설립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베틴저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아버지가 ‘난 가르치기 위해 교수가 된 것이지 내 이익을 우선시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 깊이 와닿았다”며 “이때부터 이익보다 ‘업의 본질’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객을 최우선시하는 자세는 베틴저가 찰스슈와브의 CEO로 발탁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베틴저가 척 슈와브 찰스슈와브 창업자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고객의 눈으로 모든 걸 봐야 한다”고 외친 것이 계기가 됐다. 슈와브 창업자는 훗날 인터뷰에서 “고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에 그를 차기 CEO로 발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통 중시하는 경영 철학
베틴저는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CEO다. 베틴저는 찰스슈와브 직원뿐 아니라 자신이 만난 고객이나 협력사 직원 대부분의 이름을 외우고 있다. 베틴저는 대학 시절 수강한 한 경영학 수업에서 소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당시 기말고사 시험으로 나온 문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건물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이름을 적으라’는 문제였다. 베틴저는 “그 교수님은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회사 경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싶어 하셨다”고 말했다.
소통을 중시하는 베틴저의 경영 스타일은 그가 인재를 채용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채용 인터뷰를 아침식사 시간에 식당에서 한다. 지원자보다 일찍 식당에 도착한 뒤 식당 매니저에게 지원자가 주문하는 음식과 다른 메뉴를 내오라고 미리 요청해둔다. 그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원자가 자신이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온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살펴본다. 베틴저는 “이런 문제 상황에서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연일 기자 ne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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