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농의 모태는 창업자 유시련 명예회장(90)이 1955년 설립한 ‘유경사료상회’. 양계사업은 사료공장의 제품을 테스트하기 위해 1976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사료공장에서 일하던 유 회장은 198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사이 사료공장은 문을 닫았다. 1985년 말 귀국한 뒤 부친을 도와 본격적으로 양계사업에 뛰어들었다.
1989년이 전환점이었다. 양계시설은 낙후돼 있었다. 사육 닭 수 8만5600마리에 하루 6만8000여 개의 계란을 생산하던, 당시로선 큰 규모였지만 혁신이 필요했다. 기존 농장을 허물고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유 회장은 해외에서 설비를 들여오기 위해 양계박람회가 열린 미국 애틀랜타로 향했다.
“깜짝 놀랐어요. 우리 양계시설은 너무 뒤처져 있다는 걸 깨달았죠. 가격도 국내 설비보다 크게 비싸지 않았어요. 국제전화로 한국에서 진행하던 국산 설비 사용 계획을 중단시켰죠.” 그리고 꼭 찾아가봐야 할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미국 등의 설비 전문 회사 다섯 곳을 정했다. 유 회장은 300여 개의 질문 리스트를 작성해 이들 기업을 하나씩 찾아갔다. 각 회사의 강점과 약점을 비교했다. 1년간 물색한 끝에 독일의 빅더치만(Big Dutchman)이란 회사를 찾아냈다. 세계적인 회사였다. 당시 빅더치만은 한국에서 대리점을 맡아줄 기업을 찾고 있었다. 빅더치만은 적극적인 가농 측에 대리점 사업을 공식 제안했고, 유 회장은 받아들였다. 포천 농장 입구엔 양사 협력의 시작을 기리는 기념석이 있다. 가농은 이후 30년간 국내 신축 계사의 약 40%(사육되는 닭 수 기준)에 해당하는 설비를 공급했다. 유 회장이 농장 신축을 위해 1년간 발품을 판 결과, 세계적인 기업의 독점 대리점 사업권을 따낸 셈이다.
가농은 1세대 농장을 허물고 1991년 빅더치만의 설비로 세 배 더 큰 농장을 신축했다. 유 회장은 “사실상 국내의 첫 현대식 산란계 농장을 지었더니,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견학 왔다”며 “‘똑같이 지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유 회장은 2014년 약 700억원을 투입해 농장을 다시 허물고 지금의 첨단 농장을 지었다. 계분이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모이는 비료공장에선 연 2만t의 비료도 생산하고 있다.
포천=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