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가 성립하면서 본격 등장한 ‘민족’이란 개념은 인류에게 수많은 갈등을 부추겼다. 민족이란 이름 아래 다른 민족을 대량 학살하는 비극도 적지 않았다. 민족을 구성하는 요인은 무엇이고, 순수한 단일 민족이라는 것이 가능한 건가. 프랑스 철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에르네스트 르낭(1823~1892)이 이런 고민을 담아 펴낸 책이 《민족이란 무엇인가》다.
르낭이 민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계기는 1870년 발생한 프랑스-프로이센 간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이긴 프로이센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했다. 이와 함께 독일 민족주의가 전면에 부상했다. 독일은 게르만족이라는 혈통과 독일어라는 언어를 국가 구성요건의 핵심으로 삼았다. 르낭은 민족성의 원칙을 이렇게 인종과 언어에 두는 독일식 민족주의 원리가 틀렸음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종족이나 인종, 지리, 언어, 종교 등은 민족을 결정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르낭은 “민족이 종족에서 유래한다는 믿음은 무의미하다”며 “유럽만 봐도 이 믿음의 오류는 명백하다”고 했다. 유럽은 로마제국 지배를 받던 당시 하나로 묶여 있었고, 이 국경선 안에서 수많은 민족이 몇백 년간 뒤섞였다. 로마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많은 전쟁과 이동을 통해 민족이 혼합됐다. 따라서 프랑스인은 켈트족이기도 하고, 이베리아족이기도 하며, 게르만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갈리아인, 슬라브족, 에트루리아인, 그리스인 등이 섞여 있다고 봤다. 르낭은 “순수한 종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에 입각한 민족이란 공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유럽국가들, 여러 종족으로 뒤섞여”
언어가 민족 구성의 필수 요소라고 규정하는 것도 오류라고 했다. 같은 민족이 아닌 데도 영어나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가 적지 않다는 것을 그 방증으로 들었다. 르낭은 “스위스는 서너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인종집단이 합의를 통해 하나의 민족을 형성했다”고 강조했다. 또 “개인적인 양심 문제인 종교도 민족 형성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지리적 국경선, 즉 영토를 근거로 한 민족 구분도 의미가 없다. 같은 나라에 두 개 이상의 민족이 살 수도 있고, 전쟁 결과로 국경선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민족에 대한 자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르낭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억압을 받을 때”라며 “승리의 역사보다는 패배, 억압, 고통의 기억을 공유할 때 민족성이 생긴다”고 했다. 예컨대 영국의 끊임없는 위협이 프랑스인들에게 민족성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또 “나폴레옹의 저속하고 폭력적인 군사독재는 독일 지성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이런 위협이 독일을 ‘게르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했다”고 분석했다.
“공통가치 추구, 함께 살려는 의지 중요”
르낭은 “피히테가 나폴레옹에 맞서 단결을 호소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는데, 이때의 ‘국민’은 게르만족을 가리킨다”고 했다. 독일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나폴레옹이 그런 독일 민족주의 형성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르낭의 지적은 프랑스 내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르낭은 인종, 언어 등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는 위정자들이 내부 단결 또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낸 통치 이데올로기의 특성도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민족에 충성하는 애국주의는 갈등을 차단하려는 정치적 도구”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민족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무엇인가. 르낭은 ‘의지 공동체’를 강조했다. 민족은 ‘인종과 언어·종교 등과 무관하게 함께 살고, 결속하려는 의지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도 기본 요소다. 때문에 “민족은 종족처럼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새롭게 결성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을 예로 들면 인종적 측면에서는 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르낭의 해석에 따르면 ‘인종과 관계없이 주권을 가진 존재들이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며, 동일체라고 인식하는 것이 민족’이기 때문에 미국도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르낭은 “공동체 삶을 지속하려는 욕구, 각자가 받은 유산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고, 이런 것이 존중될 때 ‘열린 민족주의’가 된다”고 강조했다.
르낭은 민족은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주관적 의지로 결정되기 때문에 영원불변하는 집단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르낭은 “민족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경계 긋기에 몰두하던 국가들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르낭은 책 뒷부분에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를 프랑스인이거나 이탈리아인 또는 독일인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 보편적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했다.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전 한국경제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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