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끝에서 희망을 찾다

입력 2019-11-10 16:00   수정 2019-11-10 16:01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곳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이 있다. 신들의 식탁 같은 거대한 테이블 마운틴을 품고, 흑인과 백인이 어울려 사는 도시다. 대항해시대 탐험가의 욕망이 머물다 간 희망봉에는 바람이 쉼 없이 불고, 케이프 포인트 등대 위로는 햇살이 난만히 쏟아진다. 모래가 고운 볼더스 비치에선 자카스펭귄 3000여 마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 비현실적인 풍경이 일상이 되는 지구 반대편 항구도시, 그곳이 케이프타운이다.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면 케이프타운 한눈에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날,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날씨가 맑은 건 행운이었다. 공항을 나서자 쾌청한 하늘 아래 푸른 테이블 마운틴이 흔들림 없이 우뚝 서 있었다. 테이블 마운틴은 정상이 식탁처럼 평평해 붙은 이름이다. 자그마치 4억~5억 년 전 얕은 바닷물 아래 형성된 사암이 지각 운동으로 솟아 높이 1086m, 길이 3.2㎞의 거대한 산이 됐다.

테이블 마운틴의 평평한 고원 동쪽에는 원뿔 모양의 데블스 피크, 서쪽에는 사자의 머리를 닮은 라이언스 헤드 두 봉우리가 있어 웅장한 풍경을 완성한다. 흐린 날엔 테이블 마운틴 정상 가까이에 구름이 걸려, 마치 하얀 식탁보를 덮은 식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구름이 형성되면 등반이 어려워진다. 혹시 하늘이 변덕을 부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내게 가이드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까지 비가 왔는데 오늘은 종일 맑을 거예요. 점심부터 먹고 테이블 마운틴으로 갈게요.”

테이블 마운틴도 식후경,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핫한 클루프 거리의 레스토랑을 찾았다. 메뉴를 보니 타조 스테이크가 눈에 띄었다. 모험심을 발휘해 타조 스테이크를 미디엄 레어로 택했다. 용기를 북돋아 줄 맥주로 테이블 마운틴의 한쪽 봉우리 이름을 딴 ‘데블스 피크’도 주문했다. 생에 처음 맛본 타조 고기의 맛은 조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웠고 맥주는 청량했다. 역시 헬렌 켈러의 말이 맞았다. 인생은 과감한 모험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360도로 회전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갈 거예요. 아무데나 서도 잘 보인답니다.” 1929년 운행을 시작했다는 케이블카 앞에서 가이드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행들은 가만히 서서 풍경을 두루두루 즐겼다. 누군가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또 누군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순간을 기록하며.


정상에 발을 내딛자 케이프타운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왕 온 김에 2시간쯤 걸리는 트레킹 코스를 걷기로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경이 펼쳐졌다. 곳곳에 전망대가 있어 뭉클한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도 좋았다. 라이언스 헤드 너머로 로빈 아일랜드까지 선명하게 내려다보였다. 로빈 아일랜드에는 인종 차별 정책에 저항하는 활동가를 가둔 감옥이 있었는데,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도 27년의 수감 생활 중 18년간 이곳에 갇혀 지냈다. 세월이 흘러 교도소는 인권박물관으로 거듭났다. 걷다가 오래 보고 싶은 풍경을 만나면 바위에 앉아 쉬기도 했다. 길의 끝자락에서 만난 스팅복도 바위에 한참 앉아 있었다. 어쩌면 저 멀리 희망봉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봉에 관한 오해와 진실

희망봉은 케이프타운의 또 다른 랜드마크다. 시내를 벗어나 희망봉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해안도로의 연속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로, 절벽 위에 2차로가 아찔하게 나 있어 커브를 돌 때마다 짙푸른 대서양 바다가 출렁였다. 바위산 아래 언덕의 집들이 해안의 낭만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hr >희망봉 정상에서 본 망망대해…용기가 샘솟았다
희망봉의 본명은 '폭풍의 곶'


소리 내어 읽기만 해도 희망이 샘솟을 것 같은 희망봉의 본명은 ‘폭풍의 곶’이었다. 1488년 처음 희망봉을 발견한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던 중 거센 바람과 폭풍으로 인도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 닻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거센 바람이 불고 폭풍이 잦은 이 곶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붙였다. 9년 뒤 또 다른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 폭풍의 곶을 무사히 통과해 인도에 당도하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희망의 곶’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은 희망봉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라 굳게 믿었다. 아프리카 최남단이 아굴라스곶인 줄 꿈에도 몰랐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희망봉을 거쳐 갔을 뿐, 케이프타운에 몰려온 사람들은 네덜란드인이었다. 1652년 동인도회사의 얀 판 라비크가 테이블 베이에 상륙한 후 네덜란드 농부들의 이주가 줄을 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어로 농부란 뜻의 보어인으로 불렸고 케이프타운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1814년부터 케이프타운이 영국령이 됐고, 1820년 케이프타운 식민지에 영국인이 4000명 이주해 왔다.

남아공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발견되자 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보어인과 영국인이 전쟁까지 벌였다. 흑인들의 땅에 백인들이 들어와 원주민을 괴롭히고 쟁탈전을 벌인 셈이다. 승자는 영국인이었다. 1910년에는 백인들끼리 남아프리카연방을 세웠고, 1948년에는 보어인의 정당인 국민당이 권력을 잡고 인종 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했다. 이것이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남아공 흑인들이 겪었던 불평등의 역사다. 하지만 남아공의 흑인들은 냉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치열한 저항 운동 끝에 자유를 되찾았다.

희망봉국립공원에 들어서자 타조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타조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바라보는데, 어제 타조 스테이크를 맛본 게 미안해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가이드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말 운이 좋네요. 희망봉은 야생동물 서식지로도 유명하지만, 타조를 보긴 힘들거든요. 희망봉에서는 누구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아세요?” 그의 말을 굳게 믿고 헉헉대며 희망봉 꼭대기에 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였지만, 막막할 때 이 순간을 떠올리면 용기가 솟을 것도 같았다. 희망은 용기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니까.

케이프 포인트에서 볼더스 비치까지

희망봉에 이어 케이프반도의 끝, 케이프 포인트를 찾았다. 바다를 향해 삐죽 튀어나온 바위 절벽으로 인도양과 대서양도 케이프 포인트에서 조우한다. 바닷길로 지구 한 바퀴를 돈 16세기 영국 항해가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예찬한 곳이기도 하다.

1857년 사람들은 희망봉에서 6㎞ 떨어진 케이프 포인트에 등대를 세웠다. 지금은 다아스 포인트에 설치한 등대에 역할을 내줬지만, 과거 선원들의 항해 길을 비춰주던 빛이었다. 케이프 포인트에 오르는 법은 두 가지다. 푸니쿨라를 타고 오르거나, 두 발로 걸어 오르거나. 푸니쿨라에 내려서 등대까지는 누구든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 위에 서서 내려다보면 대서양과 인도양 바다의 색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수도 있다.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오는 길 아프리카 유일의 펭귄 서식지, 볼더스 비치에 들렀다. 케이프반도의 동쪽 사이먼스 타운에 자리한 볼더스 비치에 사는 펭귄은 남극의 신사, 황제펭귄이 아니라 평균 키 35㎝, 몸무게 3.3㎏의 아담한 자카스펭귄이다. 자카스란 이름은 울음소리가 수탕나귀와 비슷하다는 데서 연유했지만 울음소리가 같은 남미 펭귄과 구분하기 위해 아프리카 펭귄 혹은 케이프 펭귄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변에 당도하자 자카스펭귄 무리가 편안한 자세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몇몇 펭귄은 뒤뚱거리며 바다로 향하는가 하면, 헤엄을 치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수족관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햇살과 바람을 자유롭게 즐기는 펭귄의 모습이 뭉클해 하염없이 바라봤다.

한때 백인들이 펭귄알을 요리해 먹는 바람에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982년부터 보호 운동을 시작해 볼더스 비치가 펭귄 보호 구역이 됐다. 더 놀라운 건, 1982년 이곳에 펭귄 2마리를 방사했는데 지금은 3000여 마리의 펭귄이 살고 있단다. 볼더스 비치에 사는 자카스펭귄이 37년 만에 2마리에서 3000여 마리로 개체 수가 늘어난 비결은 자유가 아닐까. 문득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성경을 인용해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하리라(Greatness from small beginning).’

케이프타운=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 메모

인천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까지는 직항이 없다. 남아공항공을 탈 경우 홍콩을 경유해 요하네스공항까지 간 뒤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계절은 한국과 정 반대며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30일간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으며, 관광지의 치안은 안전한 편이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도난 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휴대폰이나 카메라는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 통화는 랜드이며 10랜드는 약 810원이다. 전압은 240V로 어댑터가 필요하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풍토병 위험이 없어서 황열병, 말라리아 등의 예방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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