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태의 데스크 시각] 사전상속의 길 터줘야 한다

입력 2019-11-10 17:31   수정 2019-11-11 00:20

한국 산업의 고도화 시기에 창업해 회사를 키워온 대부분 중소·중견기업 오너는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력 산업의 성장세가 꺾이면서 이들 기업의 오너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느라 시쳇말로 ‘머리에 쥐가 날 판’이라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더 큰 고민은 따로 있다. 창업주가 은퇴할 시기를 훌쩍 넘겼지만 높은 상속세 부담 등으로 인해 2세 경영승계를 포함한 세대교체에 대해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세대교체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경제의 잠재 리스크가 될 것이란 우려는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세대교체에 실패하거나 포기한 ‘알짜’ 기업들이 인수합병(M&A) 시장으로 흘러들고 있어서다.

사모펀드(PEF)들도 투자 이익을 얻을 수단으로 창업주가 고령인 알짜 기업 인수를 적극 타진하고 있다. 중견기업연합회의 실태 조사 결과 중견기업의 84.4%가 “승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한 중견기업인은 “기업인 모임에서 회사가 팔렸다고 하면 박수를 받는다”며 “바뀐 세태를 탓할 일만은 아니다”고 했다.

세대교체 '골든타임', 생존 갈라

중소·중견기업의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 누진세율(65%)과 비현실적인 가업상속공제제도 등 법 규정 및 제도와 무관치 않다. 조세 부담 못지않게 ‘후계자의 경영수업 부족’과 ‘기업승계 관련 정부 정책 부족’ 등도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2세에 이르면서 점차 단절되는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과 1·2세 경영자 간 불화 등도 세대교체의 타이밍을 놓치게 하는 이유로 지목된다.

최근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해 유명무실한 가업상속공제제도보다 사전상속의 길을 터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과세특례를 받는 사전증여는 100억원으로 제한된다. 사후상속 혜택을 주는 가업상속공제(500억원)보다 지원 한도가 턱없이 작다. 이렇다 보니 중소·중견기업계에서 사전증여를 통해 경영승계를 준비하는 곳은 드물다. 중소·중견기업계에서 오너 창업자의 유고(有故) 시 급작스러운 경영승계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전증여로 승계 준비해야

한국가족기업연구소는 준비되지 않은 경영승계야말로 장수기업 생존을 위협하는 결정적 변수라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실증 사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2세대 생존율은 30%, 3세대와 4세대로 넘어가면 각각 12%와 3%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와 함께 기업승계의 성패는 창업주의 경영철학과 기업가 정신의 전수 못지않게 1·2세대 경영자 간 신뢰 구축에서 갈린 것으로 파악됐다. 승계 작업을 전면 중단한 한 기계 부품업체가 대표적 사례다. 이 회사 2세 경영인은 평직원으로 출발해 공동대표에까지 올랐지만 부친이 모든 의사결정을 뒤집자 결국 사표를 냈다.

수년 전 만난 50대 후반의 2세 경영인은 뒤늦은 경영승계와 관련해 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부친이 맨땅에서 회사를 일궜지만 사업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며 “사업을 확장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창업자의 반대에 번번이 가로막혔다”고 말했다. 이어 “사전상속 등으로 의사결정권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상황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아직도 기업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부정적 시선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업승계는 창업주가 평생 일군 경제적 가치의 대물림으로 봐야 한다. 고령의 창업주들이 기업승계 대신 회사 매각을 저울질하고, 2세들은 경영권보다 건물이나 현금 상속을 바라는 세태는 한국 산업 생태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mrhan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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