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위 국적항공사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뛰어든 정몽규 HDC그룹 회장은 지난 7일 본입찰 전 “건설업을 벗어나 모빌리티 그룹으로 가기 위해선 아시아나항공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입찰가를 높일 것을 지시했다. 당시 시장 안팎에선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 자회사를 포함한 아시아나항공 매각가가 최대 2조원 안팎에서 형성될 것으로 전망했다. HDC현대산업개발-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은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2조5000억원을 적어냈다. 경쟁자 애경그룹과의 격차를 1조원 이상 벌리며 가격 면에서 압도했다. 정 회장의 강한 인수 의지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금호산업은 12일 이사회를 열어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HDC현산-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금호산업은 “HDC현산 컨소시엄이 아시아나항공의 경영 정상화를 달성하고 중장기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수 후보로 꼽혔다”고 설명했다. HDC현산은 전날 국토교통부의 인수후보 적격성심사도 통과했다. 올해 말까지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할 예정이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마무리하면 HDC의 재계 순위는 33위에서 18위로 뛰게 된다.
정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통 큰 베팅’을 한 것은 건설업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호기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와 정부 정책 변화에 따라 사업 위험이 큰 건설업 외에 안정적인 신규 사업을 모색해왔다. 재계에선 정 회장의 부친인 ‘포니 정’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동차에서 항공으로 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건설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의지가 녹아 있다는 분석이다.
정 회장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후 서울 한강대로 HDC 본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HDC가 모빌리티 그룹으로 한걸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향후 항공을 비롯해 육상과 해상 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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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정' DNA 물려받은 정몽규…"모빌리티그룹으로 도약할 것"
정몽규 HDC그룹 회장은 HDC현대산업개발·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이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12일 오후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평소 언론 노출이 적은 그였지만 이날만은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듯 보였다. 간담회엔 실무진이 배석해 있었지만 모든 질문에 직접 답했다. 그의 발언엔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한 의지가 그대로 투영됐다.
“아시아나 경쟁력 강화가 최우선 목표”
정 회장이 간담회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아시아나항공의 경쟁력 강화다. 그는 “항공업이 어렵지만 2조원 이상 증자를 하게 되면 (아시아나항공의) 부채비율이 300% 미만으로 내려가게 된다”며 “자금 악순환이 이어졌던 아시아나항공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가 좋지 않은데 왜 인수를 추진하냐고 하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가 오히려 기회”라며 “위기일 때 오히려 상당히 좋은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고 했다.
HDC현산 컨소시엄이 입찰에서 적어낸 대로 2조원 이상의 유상증자를 하면 아시아나항공 부채비율은 660%에서 300%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부채비율이 880%에 달하는 대한항공보다 재무상태가 좋아진다. 재무구조 개선 기대가 커지면서 아시아나항공 주가는 이날 12.86% 급등해 6580원에 마감했다.
2조5000억원 베팅 배경은
HDC현산을 비롯한 HDC그룹은 대규모 투자로 인한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현재 HDC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A+다. 이에 비해 아시아나항공은 BBB-에 그치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HDC에 비해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구조가 열악하고 자산과 부채 덩치가 크기 때문에 신용등급이 한 단계 하향 조정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그러나 ‘승자의 저주’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HDC현산 컨소시엄은 입찰 과정에서 5조원 이상의 자금 증빙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금융(인수합병용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기존 현금 및 현금성 자산과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해 자금을 충분히 댈 수 있다고 과시한 것이란 풀이다.
범(汎)현대가의 지원사격도 예정돼 있다.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 회장은 인수전 초기부터 오너가 모임에서 조언을 구하고, 인수전 막판에는 범현대가 여러 그룹에서 아시아나항공의 여객 및 물류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의향서(LOI)를 받아 매각 측에 제출했다.
아시아나항공 산하의 저비용항공사(LCC)나 사업부를 떼어내 매각해서 곧바로 현금을 회수하는 것도 가능하다. 정 회장은 간담회에서 “에어부산과 아시아나IDT 등 인수 계획은 구체화된 게 없다”며 “전략적 파트너와 회사를 세우는 것까지 열어놓고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모빌리티그룹 지향
정 회장은 원래 현대자동차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다. 1988년 현대차에 입사한 뒤 1993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34세였던 1996년엔 현대차 회장직을 맡았다. 아버지 고 정세영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현대차의 운전대를 잡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현대차 경영권이 정몽구 회장에게 넘어갔고, 정몽규 회장은 현대산업개발을 받게 됐다. 정 회장은 2005년 부친이 타계한 이듬해 부친의 별칭을 딴 ‘포니정 재단’을 세워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재계에선 정 회장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부친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한다.
정 회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HDC가 모빌리티그룹으로 한걸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HDC현산은 경전철 등 육상 사업과 항만 등 해상 관련 사업을 이미 하고 있다.
자회사 지배구조는 ‘숙제’
남아 있는 과제 중 하나는 아시아나 자회사들의 지배구조 조정이다. 이번 인수는 아시아나항공과 자회사들을 한꺼번에 사오는 방식이다. 문제는 현행 공정거래법상 지주사 손자회사는 증손회사의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시아나 자회사 중 에어서울, 아시아나에어포트, 아시아나개발은 아시아나항공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시아나IDT와 에어부산, 아시아나세이버의 지분율은 각각 76.2%, 44.2%, 80%에 그친다. 지분을 더 사서 100%를 맞추든지 재매각해야 한다.
이상은/구민기/김은정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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