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정부 배급제'로 가는 한국 교육

입력 2019-11-12 17:53   수정 2019-11-13 10:41

학교라는 곳은 특이한 공간이다. 교육이라는 재화가 거래되는 시장적 관점에서 보면 교사와 학교는 생산자, 학생과 학부모들은 소비자다. 그런데도 생산자가 소비자에 대해 압도적 지위를 갖는다. 교육 방식이나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제대로 대항할 수도 없다. 3년 동안 주입식 이념교육을 감내하다가 학생부 작성이 끝난 뒤에야 반기를 든 인헌고 학생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학교 제도는 전통적으로 교사의 지위를 강화하는 쪽으로 만들어져 왔다. 소수이지만 강력한 결속력을 갖고 있는 교원단체의 힘이 다수이지만 흩어져 있는 학생들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등학교든, 대학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들이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조국 같은 사람의 서울대 복직이 보장돼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육 공급의 최정점에는 정부가 자리잡고 있다. 정부는 국공립 학교들뿐만 아니라 온갖 제도적 장치로 사립학교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정부가 수십 년간 존속해온 외고 자사고 국제고를 2025년부터 일괄 폐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그 증거다. 폐지 대상 79개 학교 중 59개가 사립이다. 학교를 교육기업으로 치면, 정부가 하루아침에 민간기업의 기본 운영틀과 판매 상품을 바꾸라고 명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선 학생 선발권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뺑뺑이 선발’이다. 교육 과정도 완전히 바꿔야 할 판이다. 특성화 교육을 하지 않고 입시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 폐지 명분이기 때문이다.

교육이 시중에 판매하는 휴대폰 같은 상품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반문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교육은 정부가 독점적으로 공급해야 할 공공재가 아니다. 교육이 공공재라면 국방이나 치안처럼 그것을 누리는 데 개별적 비용이 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민간은 막대한 비용 때문에 공급할 엄두를 낼 수 없어야 한다. 교육은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학교 밖에서 날로 번창하는 사교육 산업을 보면 더욱 그렇다. 사교육은 정부가 교육을 독점한 데서 나온 비효율과 낮은 생산성 때문에 존재한다. 교육 시장에서 ‘정부의 실패’가 지속되는 한, 역설적으로 사교육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물론 교육이 국가 발전과 사회 안정에 중요하고 인적 자원 개발에 따른 경제적 외부효과도 큰 만큼 정부의 역할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단기에 개별 학교들이 큰돈을 들여 투자하기 어려운 교육분야가 나타나면 개입할 수도 있다. ‘기회의 균등’을 위해 저소득층의 고등교육도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학교와 교육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건강한 성장과 발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쏟아지고 세계 각지의 지식과 경험들이 다양한 경로로 사회에 축적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만큼 학교도, 교육도, 전달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학교가 좋은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가격대를 갖춘 상품을 내놓고 학생들은 자신의 요구와 경제적 능력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몇 가지 상품을 내놓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교육판 배급제에 다름 아니다.

일반고 전체의 수준이나 교육적 역량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교원의 자질은 우수하다. 웬만큼 준비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임용고시를 통과할 수 없다. 관건은 교육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획일적 평준화로 거대하게 돌아가는 공교육에선 학생뿐만 아니라 학교도 선택지가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다양한 교육도 적기에 제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교육은 또다시 학원가 골목으로 수많은 학생을 밀어넣을 태세다. ‘사교육 광풍’이 몰아닥치면 정부는 또다시 학교·입시제도를 손보겠다고 나설 것이다. 정작 자신이 문제의 근원일 텐데 말이다.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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