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CEO 해임 요구는 기업에 대한 심각한 경영권 침해"

입력 2019-11-13 17:21   수정 2019-11-14 01:42


국민연금이 내년 초 본격적인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기업 이사 해임과 정관 변경까지 요구하는 길을 여는 등 경영 참여의 강도를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기업들은 “경영참여가 아니라 경영간섭”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13일 개최한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목적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 및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공청회에서 국내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 본격화를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이사해임까지 요구하는 국민연금

국민연금은 이날 공청회에서 경영참여 목적의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본지 11월 13일자 A24면 참조

가이드라인엔 국민연금이 경영참여 목적의 주주권을 행사할 대상 및 방법, 추진 가능한 주주권 행사 내용 등이 담겼다. 이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배당 전략이 부실하고 △임원 보수 한도가 부적정하며 △법령상 위반 우려로 기업 가치가 훼손되고 △지속적인 반대 의결권 행사에도 경영 개선이 없는 경우 이를 ‘중점관리사안’으로 분류한 뒤 경영참여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횡령, 배임, 공정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 이사의 경우 형이 확정되지 않았어도 기업 가치를 훼손했다고 판단해 주주제안을 통해 이사 해임을 요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지속적으로 반대 의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안건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이에 대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도 해임 건의가 가능하도록 했다. 사외이사나 감사를 선임할 때는 집중투표제 도입을 동시에 요구해 선임 가능성도 높일 계획이다. 정부는 이달 말 예정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가이드라인을 최종 결정할 계획이다.


“주주권을 내세운 경영 간섭”

국내 상장사 가운데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은 모두 313개에 달한다. 국민연금이 10% 이상 지분을 가진 상장사도 97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카카오 등 13개 기업은 국민연금과 외국인이 공조할 경우 사내이사를 해임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공청회에선 책임 투자가 정권 입맛에 맞게 해석되는 ‘연금 사회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기업가치 훼손’ 등 객관적 판단이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기금운용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곽관훈 선문대 교수는 “투자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현재의 국민연금 기금운용 의결구조를 그대로 둔 채 국민연금에 과도한 권한이 주어질 경우 부작용이 클 것”이라며 “예상치 못한 상황 등 가이드라인 내 모호한 부분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까지 국민연금이 정관 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박재홍 김앤장법률사무소 전문위원은 “기업에 따라 집중투표제 도입이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며 “기업의 법인 정관 변경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은 개별 기업의 상황을 고려해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연금 사회주의 현실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를 회원으로 둔 한국상장사협의회도 “이번 가이드라인은 사실상 연금 사회주의를 현실화하는 방안”이라고 비판했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재벌 개혁의 칼로 쓰겠다는 의도”라며 “국민연금이 거대 행동주의 펀드로 변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장협은 정부가 추진 중인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가이드라인에 나온 주요 주주권 행사 내용이 경영참여가 아니라 일반투자 목적으로 분류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은 공적 연기금이 정관 변경, 배당, 임원 보수 등과 관련한 주주 제안을 위해 기업 지분 5% 이상을 보유하는 것을 경영참여가 아니라 일반투자 목적으로 분류해 해당 내용을 월별 약식 공시만 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공시 의무가 한층 완화되면서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개입이 수월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정치적 독립성과 전문성부터 확보해 수익성을 개선하는 게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황정환/김진성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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