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진보에 한 획을 긋는 연구논문을 꼭 완성해서 노벨생리의학상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인 이승훈 세닉스바이오테크 대표(48)의 포부다. 뇌졸중 명의로 꼽히는 임상의사라는 자부심도 크지만 기초연구 분야에서 국내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성과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 3년 전 창업 전선에 뛰어든 것도 꿈 실현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회사는 뇌졸중의 하나인 지주막하출혈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아직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분야다. 이 대표는 “여느 신약보다 개발속도가 빠른 것은 물론 진취적이고 효율적인 혁신 신약이 될 것”이라며 “다국적 제약사들이 눈독을 들일 만큼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바이오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노벨상 꿈꾸는 임상의사
서울대 의대를 나온 이 대표는 2005년 서울대병원 교수로 부임했다. 환자 진료에 보람을 느꼈지만 가끔 허무감이 밀려왔다. 쳇바퀴처럼 환자 진료만 하는 임상의사에 머물렀다가는 자칫 부속품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는 탈출구를 실험 연구에서 찾았다. 환자 의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임상 연구를 선호하는 주변의 동료 임상의사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는 “실험 연구는 성과물을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당장 환자에게 와닿는 결과물을 내기 어려워 임상의사들에게 외면받는다”면서도 “세상에 임팩트를 줄 만한 연구 성과를 남기고 싶어 기초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공분야를 신경과로 정하고 뇌졸중 전문의가 된 것도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서였다. 그는 “문제 해결 방식이 객관적인 잣대로 이뤄지는 게 성미에 맞다”며 “검사를 통해 원인이 명확하게 나오는 뇌졸중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레지던트 1년차 때부터 했다”고 말했다.
국가 연구 프로젝트가 창업 밀알
10여 년 전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이 대표는 나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나노 열풍이 거셀 때였다. 그는 나노 기술을 의료에 활용하는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국내 나노 기술 선구자로 꼽히는 현택환 서울대 공대 교수와 손잡고 나노 바이오 기술을 개발하는 국책 연구과제를 따냈다. 2011년부터 9년 연속 보건복지부 지원을 받아냈다. 제약사 등의 지원을 포함하면 이 기간 지원받은 연구비는 16억5000만원에 이른다.
이 대표는 산화세륨 연구를 본격화했다. 산화세륨을 나노입자로 만들어 질환 치료에 적용하는 연구였다. 그는 “산화세륨을 세포보다 작은 나노 크기로 자르면 세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금속인 세륨은 희토류에 흔한 물질이다. 연마제, 태양광 패널 등 공업용 소재로 주로 쓰인다. 산화된 형태인 산화세륨으로 존재한다. 이 대표는 산화세륨이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는 데 주목했다. 산화세륨이 질환 치료에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연구논문도 나온 터였다. 2006년 국제학술지 네이처나노테크놀로지에는 산화세륨이 망막 변성 개선에 효과가 있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산화세륨이 질병 치료 연구에 적용된 첫 사례였다.
이 대표는 연구 끝에 산화세륨이 뇌출혈과 그로 인한 합병증을 일으키는 활성산소를 줄여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활성산소는 우리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물질이다. 세포를 죽이거나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감염 심근경색 등 우리 몸에 큰 병이 생겼을 때가 문제다. 활성산소가 염증을 키우고 세포를 공격해 병을 더 악화시킬 수 있어서다. 뇌경색 뇌출혈 등에서도 이런 활성산소에 의한 무균성 염증이 뇌세포 사망의 주요 원인이 된다.
이 대표는 산화세륨으로 뇌경색을 잡는 실험을 시작했다. 당시 100여 건의 뇌경색 후보물질 임상이 줄줄이 실패하던 때였다. 그는 “뇌출혈에도 산화세륨 나노물질을 적용해봤는데 놀라울 정도의 실험 결과를 얻었다”며 “이때부터 뇌출혈의 일종인 지주막하출혈 치료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주막하출혈은 뇌 동맥 꽈리가 터져 생긴다. 터져나온 피가 일으키는 염증이 주요 사망 원인이지만 이를 제거할 방법이 마땅찮다. 수술을 통해 추가 출혈을 막는 게 고작이다. 사망률이 50~60%에 이르지만 아직 치료제가 없다.
전화위복 된 기술이전 실패
산화세륨 나노물질의 가능성을 본 이 대표는 2016년 창업했다. 한 제자가 “이 약을 세상에 끄집어내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며 창업을 강력히 권고한 게 계기였다. 그리고는 연구에만 몰두했다.
지주막하출혈 치료 후보물질인 ‘베이셉’은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베이셉은 지주막하출혈 초기에 염증을 일으키는 활성산소를 없애 뇌신경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다. 베이셉을 투여한 실험 쥐의 2주 후 생존율은 88.2%로 대조군(21.1%)보다 네 배 이상으로 높았다. 이 연구 결과는 지난해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국제뇌졸중학회에서 발표됐고 ‘최고 기초의학상’을 받았다. 지난해 말에는 뇌졸중 분야 학술지 ‘뇌졸중(Stroke)’ 표지논문으로 게재됐다.
연구과정은 순탄했지만 특허 관리가 뜻밖에 발목을 잡았다. 해외에 출원한 두 건의 특허를 등록하는 데만 수억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재를 털어 마련한 초기 자본금 5000만원이 전부였던 이 대표는 지난해 말 국내 제약사들에 손을 내밀었다. 기술이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10여 곳의 제약사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나노 의약품을 연구할 인력은 물론 시설조차 없었던 탓이다.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회사의 연구 성과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올초부터 투자하겠다는 벤처캐피털이 줄을 섰다. 이 대표는 “당초 10억원가량을 투자받을 계획이었으나 투자하겠다는 곳이 많아 40억원으로 규모를 늘렸다”고 했다.
“이르면 2년 뒤 임상 시작”
세닉스바이오테크는 베이셉 임상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내년 초 미국에서 베이셉의 독성검사를 먼저 시작할 예정이다. 독성검사가 마무리되면 2021년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 1상 시험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 대표는 “베이셉 등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 임상은 모두 미국에서 진행할 것”이라며 “베이셉 독성검사에 앞서 미국에 지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베이셉 임상은 미국 내 뇌혈관 응급센터에서 시행한다. 각 센터에 약을 먼저 비치한 뒤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면 상태에 따라 적정 용량의 약물을 정맥주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게 된다. 이렇다 보니 임상 비용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는 “임상 1상 또는 2상 단계부터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다국적 제약사들과 손잡고 공동 연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이셉 공정기술 개발도 완료 단계다. 이 대표는 “무기재료 나노입자 의약품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물론 상용화를 세계 최초로 시도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며 “뇌출혈 치료제 분야에서 글로벌 선구자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뇌손상 치료제도 개발 중이다. 현재 효능 시험 단계다. 외부 충격 등으로 인해 생기는 뇌 손상을 최소화해주는 치료제다. 뇌가 손상되면 생기는 염증을 줄여줘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다. 그는 “뇌손상 치료제는 베이셉과 같은 산화세륨 나노물질 기반이어서 독성시험 결과가 비슷할 것”이라며 “내년 자금 사정을 봐가며 임상 일정을 잡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패혈증 치료제로 파이프라인을 더 늘려갈 것”이라고 했다.
“빅파마 주목받는 벤처 될 것”
이 대표의 벤치마킹 대상은 이탈리아 바이오기업 AAA다. 2002년 설립된 이 회사는 20년에 걸쳐 신경 내분비 종양 치료제를 개발해 지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이 치료제는 단순 치료제가 아니다. 질환을 고치는 치료제인 동시에 진단까지 가능한 최초 의약품이다. 합성물질에 방사선 동위원소를 붙이는 방식을 썼다. 이 기술 덕분에 2년 전 스위스 노바티스가 39억달러에 이 회사를 인수했다.
“AAA에 투자했던 주주들은 큰돈을 벌었고 직원들도 고용승계가 이뤄져 든든한 기업 밑에서 신약을 개발할 수 있게 됐어요. 직원과 주주 모두 큰 보상을 받은 것이죠. 세닉스바이오테크도 AAA처럼 다국적 제약사들이 인수하려고 눈독을 들이는 기업으로 키워내고 싶습니다.”
세닉스바이오테크는 2~3년 뒤 코스닥 상장이 목표다. 베이셉이 임상 3상 직전이거나 진입할 시점이다. 이 대표는 “베이셉뿐 아니라 다른 파이프라인들도 임상 단계에 들어가 있을 시점”이라며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만큼 상장을 통해 조달하려 한다”고 했다.
이 대표의 꿈은 여전히 노벨상 수상이다. 세상을 바꿀 의미있는 기초연구 성과를 언젠가 내놓겠다는 각오다. 임직원들이 창의력을 발휘해 기초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는 꿈도 꾸고 있다. 그는 최근 직원 워크숍 때 세기의 복서였던 무하마드 알리의 명언을 들려줬다. ‘만약 당신의 꿈이 당신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면, 그 꿈은 충분히 크지 않은 것이다.’ 그는 “회사와 직원 개개인은 서로 이익을 공유하고 미래 목표를 이뤄나가는 관계”라며 “회사를 키워 직원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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