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표현하면 ‘야성(野性)’이다. 사전적 정의는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이지만 뉘앙스는 크게 이뤄보겠다는 포부, 즉 야망(野望)에 더 가깝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명구를 기억하는 것도, 알 수 없고 두렵기까지 한 미래에 대한 최상의 격려여서다.
희수(喜壽·77)의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자서전 <명과 암 50년-한국 경제와 함께> 출판기념회에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야성’을 언급해 눈길을 끈다. 두 원로는 서로를 ‘야성 충만한 관료’로 기억했다. 법규를 근거로 일하는 관료의 수식어로 ‘야성’이 어색하지만, 적당히 타협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논쟁하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던 젊은 날의 ‘패기와 기개’를 그렇게 표현했을 듯싶다.
요즘 ‘야성 있는 관료’가 안 보인다는 두 원로의 개탄이 온통 축 처진 현실을 함축한다. “정치적 결정에 대해 관료들이 과학적 판단으로 견제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사라져 답답하다”(윤 전 장관)는 것이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건너뛰고, 무리한 탈원전에도 제동 거는 관료가 없고, ‘재정 지킴이’라던 기재부가 ‘돈 퍼붓기’에 앞장서니 개탄할 만도 하다.
관료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 전체의 야성이 사라져 간다. 관료는 정권 눈치를 보고, 기업인은 공무원 눈치를 보고, 청년들은 스펙쌓기에 지쳐간다. 어린 학생들도 지레 조숙해져 장래희망이 교사 의사 공무원이다. 야성이라고는 ‘정글의 법칙’에서나 찾아야 할까.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그랬듯이, 고령화와 저성장에 갇히면 뭘 해도 안 되니 자포자기가 빠르다. 청년들은 주눅들고 숨는다. 여기에 “너 몇 살이야” “나이도 어린 게” 등 한국식 나이갑질까지 더해져 스스로 야성을 숨기게 한다.
사회적 기대수익률이 떨어지면 도전보다 안주, 자립보다는 의존 성향이 강해진다. 포퓰리즘 정치는 이에 편승해 매표(買票)에 혈안이다. 뭘 고쳐야 할지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안 한다. 우리 사회도 한때는 ‘야성적 충동’이 살아 숨쉬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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