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로 잘 알려진 HDC현대산업개발을 이끄는 정몽규 HDC 회장의 전공은 원래 자동차였다. 현대자동차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지만 현대그룹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함께 건설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건설 문외한이었던 그는 오히려 과감한 경영을 펼쳤다. 남들은 리스크가 크다며 피하는 개발사업에 적극 나섰고, 이를 통해 쌓은 전문성은 불황에 높은 수익성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HDC현산을 10대 건설사로 키워냈다. 정 회장은 20여 년 만에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2조5000억원에 이르는 ‘통 큰 베팅’이다. 경기나 정책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건설업의 한계를 벗어나 항공·레저를 아우르는 재계 순위 20위권의 ‘모빌리티 그룹’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압구정 현대부터 42만 가구 ‘최다 주택공급’
HDC현산은 서울 강남권 ‘부촌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압구정동 일대 현대아파트를 지은 기업이다. 1976년 주택건설 전문업체로 설립된 한국도시개발이 1986년 토목 및 플랜트 건설업체인 한라건설과 합병되며 현재의 사업 뼈대를 갖췄다. 압구정동을 비롯해 분당 신도시, 인천 부평 등에서 대규모 아파트와 전원주택, 주상복합 아파트 사업을 펼쳤다. 연간 평균 1만 가구 이상을 지으면서 주택 명가(名家)로 자리잡았다.
HDC현산 역시 외환위기의 파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8000여 가구의 미분양 물량이 쌓여 자금난을 겪었다. 사옥으로 사용하던 서울 역삼동의 랜드마크인 아이타워(강남 파이낸스빌딩)마저 팔아야 했다. 정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의지로 2001년 3월 아파트 브랜드 ‘아이파크(IPARK)’를 내놓고 질적 성장을 꾀했다.
“아파트를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니라 문화를 창출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은 달라지는 소비자의 니즈와 맞아떨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와 부산 해운대 아이파크다. 뛰어난 입지에 조망, 외관, 조경, 설비 등이 잘 갖춰진 고급 주상복합으로
자리매김하며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렸다. 삼성동 아이파크는 현재 대표적인 초고가 아파트로 꼽힌다. 지난해 펜트하우스가 105억원에 팔렸다. HDC현산이 1976년 이후 공급한 주택은 42만 가구로 국내 시공사 중 가장 많은 물량이다. 올해 시공능력평가 순위는 9위다.
불황에 효자된 디벨로퍼 역량
HDC현산은 단순시공을 주력으로 하는 다른 건설사와 달리 자체사업 비중이 높다. 건설사라기보단 디벨로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직접 땅을 구입하거나 도시개발 사업을 통해 주택을 시공·분양하는 사업에 적극적이다. 단순 시공으로 공급 가구 수를 늘리는 형태가 아니라 대규모 자체 사업은 개발계획, 분양, 시공 등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 시공업보다 리스크가 크지만 사업이 성공할 경우 돌아오는 수익도 크다.
지난 3분기 기준 자체 주택사업 비중은 전체의 30~40%가량(매출 기준)이다. 2017년 하반기 광운대역 역세권 개발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올 상반기 인천 용현·학익지구 도시개발사업, 하반기에는 광명동굴 주변 개발사업과 서울 용산병원 부지개발 사업 등에 뛰어들었다.
자체 사업은 건설사들의 주 먹거리인 주택사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해외건설 시장마저 중국업체에 밀리면서 HDC현산의 독보적인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건설산업이 위축된 3분기에도 매출 8714억원, 영업이익 938억원으로 10.8%의 영업이익률을 냈다. 지난 분기(13.5%)에 이어 두 자릿수대 이익률을 유지했다. 10대 건설사들의 이익률이 한 자릿수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수익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엔 ‘종합 부동산·인프라 그룹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과감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일본의 최대 부동산개발회사인 ‘미쓰이부동산’ 같은 회사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다. 국내 건설회사 최초로 건축부문과 토목(건설)부문을 통합한 건설사업본부를 포함해
발·운영사업부, 경영기획본부 등 ‘3본부’ 체제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초에는 정보업체 부동산114를 인수해 비즈니스 플랫폼을 확대했으며, 11월엔 사장 직속으로 미래혁신실을 만들기도 했다.
건설 넘어 종합 ‘모빌리티 그룹’으로
설립 43년째를 맞은 HDC현산은 지주회사인 HDC를 중심으로 건설업을 벗어나 모빌리티 그룹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 12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국내 2위 국적항공사 아시아나 인수가 전환점이다. 아시아나항공의 연매출은 약 7조원으로 HDC그룹 전체(6조5000억원) 매출과 맞먹는 규모다. 건설업과 함께 항공이 그룹사업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모빌리티 그룹으로의 변화는 정 회장 부친이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셋째 동생인 ‘포니 정’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 ‘포니’ 신화를 일군 인물이다. 자동차에서 항공으로 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건설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의지가 녹아 있다는 분석이다. HDC현산은 경전철 등 육상 사업과 항만 등 해상 관련 사업에도 진출해 있다.
정 회장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후 열린 간담회에서 “경제가 어려울 때가 오히려 상당히 좋은 기업을 인수할 기회”라며 “향후 항공을 비롯해 육상과 해상 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그룹 위상도 높아진다. HDC그룹은 올해 5월 기준 자산총액 10조6000억원으로 공정거래위원회의 공시 대상 기업집단 59개 중 33위다.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공격적인 사업 다각화로 호텔, 면세, 유통, 레저관광 및 리조트사업까지 발을 뻗으면서 총 2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올해 기업집단 순위에서 지난해보다 13계단 오르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마무리하면 HDC의 재계 순위는 33위에서 18위로 뛰게 된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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