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아버지들과 아들들

입력 2019-11-21 17:28   수정 2019-11-22 00:08

습관처럼 채널을 돌리는데 비슷한 그림이 연속해 나온다. 리모컨이 고장났나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화려한 이미지의 팩션 사극(역사적인 사실과 허구를 섞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편성 제안서가 여러 채널에 돌아다녀서인지 서로 대응하느라 가끔 유사 장르가 동시에 방영되는데, 요즘이 그런 시기인가보다.

전문 매파(媒婆·혼인 중매자)로 나선 양반가 도령들이 주인공인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JTBC)은 아들 마훈(김민재 분)이 잔혹한 세력가인 아버지 마봉덕(박호산 분)에 반발하며 민심을 치유하는 이야기다. 왕을 바꾸려는 아버지의 욕망으로 갈등은 고조되고, 아들들은 젊은 왕 이수(서지훈 분)의 첫사랑인 노비 출신 개똥이(공승연 분)가 중전으로 간택되도록 공모하기에 이른다.

뿌리 깊은 편견과 욕망의 화신이 돼 세상을 바꾸려는 아버지와 세심하게 민심을 읽으며 개개인의 가치와 본질을 소중히 여기는 아들의 충돌은 젊은 임금도 각성하게 한다. 구세대의 편법은 신세대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에 밀려난다. 마훈은 천민인 망나니와 노비에게 꿈을 선사하고, 스스로도 노비인 개똥이와 맺어진다. 아버지의 법을 뒤집어 무력화한 파격 행보다. 특정 왕조를 배경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신분제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아들들의 행보는 통쾌할 정도다.

열녀문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숨어 사는 과부들 마을에 왕의 아들 녹두(장동윤 분)가 여장을 하고 잠입한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조선 로코-녹두전’은 광해군 시절이 배경이다. 아기 때 아버지 광해군(정준호 분)으로부터 버림받은 녹두는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지만, 이는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다. 불안에 떨며 왕위에만 집착하는 아버지를 껴안기 위해서다. 건강하고 쾌활한 성정의 버려진 아들이 정신적으로 병약한 권력자 아버지에게 내미는 화해의 제스처가 역사적 사실을 비켜나가며 코믹하고 애잔하게 그려진다.

‘나의 나라’(JTBC 방영)는 고려 말 조선 초 권력의 교체를 피비린내 나는 액션으로 그린다. 역사적으로는 이성계(김영철 분)와 이방원(장혁 분)의 대결이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허구 인물 서휘(양세종 분)와 남선호(우도환 분)다.

각기 숙적이자 아버지인 남전(안내상 분)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지만, 이 또한 권력이 목적은 아니다. 자신만의 대의를 향해 모략하고 파괴하는 아버지들의 폭주는 소의도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아들들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무너진다. 각자가 내세운 신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를 거듭하는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또한 역사의 생리인 것이다.

러시아 문호 이반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들>(1862)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즉 세대 간 갈등을 다룬 이런 드라마의 원형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들만의 권위주의와 낭만주의가 옳다고 강요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대의인가’부터 의문을 품고 아버지들이 외면하는 실증주의와 자유주의, 합리주의에 주목한다.

아들은 금세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는 과거의 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첨예하게 그린 최근의 팩션 사극들은 포용과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 허무하게 스러진 청년 주인공 바자로프의 무덤 위 꽃 한 송이로 부모의 마음과 영원한 화해, 무한한 생명을 상징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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