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영업비밀 누설과 기술유출 관련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최근 3년간 관련 사건 발생만 2000건을 넘었고, 재판에 넘겨진 것(기소)만 233건에 달했다. 현재 진행 중이면서 공개된 사건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간 전기차 배터리 기술 관련 사건, 대웅제약과 메디톡스간 보툴리눔 톡신(일명 보톡스) 영업 비밀 침해 사건, 삼성디스플레이와 톱텍, 대유위니아와 경동나비엔 간 사건 등이 있다. 임형주 율촌 변호사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영업비밀침해 사건이 더 많다”며 “기업간 치열해진 기술경쟁, 법개정, 정부의 단속 의지 등으로 관련 사건이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로펌들도 대응력을 키우고자 관련 조직을 확대하고 있다. 대형 로펌 형사팀 한 변호사는 “경제 관련 사건이 없어 로펌 송무팀이 저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영업비밀침해 사건은 꾸준히 늘어 로펌의 새로운 수익원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경쟁·법개정으로 사건 급증
24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영업비밀누설 등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사건이 검찰에 접수된 건수는 작년 852건으로 전년보다 41.5% 급증했다. 올해 들어 지난 10월까지 접수된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사건 접수도 605건으로 2017년 연간 수치(602건)를 넘어선 상태다. 최근 3년간 부정경쟁방지법 입건수는 총 2059건, 기소 건수는 233건에 달한다.
한 특허전문 변호사는 “경제가 나빠질수록 기업들은 다른 회사에서 직원을 빼내려는 수요가 늘어난다”며 “대기업들도 기존 사업 모델이 성장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신사업 진출을 추진하다보니 중견·중소기업의 핵심 연구 인력을 영입하며 영업비밀을 침해하는 사건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가 좋아 회사가 성장 가도를 달릴땐, 직원들이 이동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현재와 같은 침체기에선 핵심 인력 이직이 곧 회사의 경쟁력 하락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관련 분쟁과 소송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법 개정으로 영업비밀침해, 기술유출 관련 소송이 쉬워진 것도 사건 증가의 원인이다. 새로운 특허법과 부정경쟁방지법은 지난 7월 9일 시행됐다. 개정안은 영업비밀성을 인정하는 요건을 기존 ‘합리적인 노력에 의해 비밀이 유지되던 사안’에서 ‘비밀로 관리되는 사안’으로 완화했다. 중소·중견기업의 법적 대응이 용이해진 것이다. 형사처벌 수위는 오히려 강화됐다. 타인의 영업비밀을 고의로 침해할 경우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시행됐고,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에 따른 징역형은 기존 10년 이하(국내)에서 15년 이하로, 벌금형은 1억원 이하에서 15억원 이하로 상향됐다.
사정기관의 단속의지도 강해졌다. 검찰은 수원지검을 기술유출 등 첨단산업보호 중점청으로 지정해 관련 사건 엄단에 나섰고, 경찰도 산업기술유출범죄수사팀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2차전지·제약·스타트업서 급증
영업비밀침해 사건이 발생하는 업종도 유행을 탄다. 과거엔 발광다이오드(LED)업체, 발전업계, 스마트폰 제조 관련 기술유출 사건이 많았다면 최근엔 2차전지와 제약업계, 기계·화학업종, 게임업체, 스타트업 등에서 많이 발생한다.
최근 한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은 전 직원 A씨를 대상으로 전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프로젝트 팀장이던 A씨가 경쟁사로 이직한 후 경쟁업체의 사업제안서와 용역제안서가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스타트업은 직원이 회사를 옮기면서 외국에 서버가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기밀을 빼돌린 정황을 확인했다. 김희제 한결 변호사는 “스타트업은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등 업계 트렌드에 맞춰 이직이 큰 편”이라며 “아이디어가 매출로 직결되는 만큼 영업비밀침해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타트업계에선 제도적으로 인사 관리를 하기보다 특정 개인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 점도 관련 사건이 늘어난 배경이다. 민인기 태평양 변호사는 “아무리 작은 업체라도 한 직원이 모든 걸 관리하게 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감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업비밀침해·기술유출 사건의 80%는 이직 과정에서 벌어진다. 범행 수법도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김지현 태평양 지식재산권(IP)그룹장은 “과거엔 특정 시점에 한번에 자료를 빼돌리는 추세였다면 이제는 오래전부터 계획해 여러차례 빼돌리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파일을 빼돌릴땐 외국에 서버가 있어 국내 검찰이 압수수색할 수 없는 ‘구글 드라이브’가 많이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PC화면에 자료를 띄워놓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땐, 소형 녹음기에 관련 내용을 줄줄이 읽는 수법도 활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임 경쟁나선 대형 로펌들
로펌들은 관련 사건 대응력을 높이기위해 특허 조직과 형사팀간 유기적 협업시스템을 구축하며 전문가를 영입하고 있다. 김앤장 영업비밀·기업정보보호그룹은 대형 로펌 가운데 가장 앞선 2009년 발족됐고, 가장 큰 규모의 조직(국내 변호사만 50여명)을 자랑한다. 첨단범죄수사부(첨수부) 검사 출신인 정중택 변호사, 대법원 지식재산권 팀장 출신인 유영선 변호사, 영업비밀 소송 경험이 많은 이석희 변호사 등이 주축이다. 로펌 중 가장 많은 변리사를 보유한 김앤장은 중소기업의 아이디어 침해사건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탈취분야 전담 내부팀도 조직한 상태다.
광장과 태평양 모두 2011년부터 전담팀을 꾸려 계속 확대해나가고 있다. 광장의 경우 국내 변호사와 미국변호사, 디지털포렌식(PC, 휴대폰 증거분석) 전문가 등 48명의 전문가로 팀을 구성했다. IP그룹장인 김운호 변호사를 팀장으로 이태엽 디지털포렌식팀장, 장선 변호사, 서울중앙지검 첨수부 부장검사 출신인 박근범 변호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광장은 삼성과 애플간 세기의 특허대결에서 삼성쪽을 대리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포스코와 신일본제철간 영업비밀 소송에서도 포스코측을 대리해 합의를 이끈 경험이 있다.
태평양의 영업비밀 분쟁대응팀은 42명의 전문가로 조직됐으며 특허법원 수석부장판사 출신인 권택수 대표와 영업비밀 사건 전문가인 김지현 IP그룹장, 이희종 변호사 등이 주축이다. 대검 디지털수사담당관 출신 정수봉 변호사와 대전지검 특수부장 출신인 이정호 변호사를 최근 영입했다. 영업비밀 유출조사, 회사 내부비리조사, 공정거래 조사 등 포렌식 조사에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것이 강점이다.
율촌(기술유용대응팀, 26명)은 최근 서울반도체와 대만 에버라이트, 대유위니아와 경동나비엔간 기술유출·영업비밀침해 사건에서 서울반도체와 대유위니아측을 대리해 성과를 내며 주목을 받았다. 한국지적재산권변호사협회 회장인 최정열 변호사와 국가정보원이 주도하는 산업기술보안한림원에 변호사 최초로 정회원이 된 임형주 변호사, 공정거래 및 방송통신 전문가 한승혁 변호사 등이 주축이다. 최근 김경수 전 대구고검장과 국제 형사통인 이영상 변호사, 특수통인 이시원 변호사 등 검찰 출신을 영입해 형사분야를 강화했다.
세종(영업비밀팀, 20명)은 현재 진행중인 메디톡스와 대웅제약, 삼성디스플레이와 톱텍간 영업비밀침해 분쟁서 메디톡스와 삼성디스플레이를 대리하고 있다. 대법원에서 아모레퍼시픽의 쿠션팩트 특허 무효 판결을 이끈 임보경 변호사가 팀장을 맡고 있으며 정창원 변호사, 류정선 변호사 등이 주축이다. 미국 특허청 심사관 출신 최재훈 미국 변호사, 삼성·LG 디스플레이 영업비밀 침해 항소심 재판장 이종우 변호사를 최근 영입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간 소송에서 SK쪽을 대리하고 있는 화우는 작년 8월 IP 외에 형사, 공정거래, 노동 등 4개 팀을 통합해 영업비밀 TF(20명)를 구성했다. 이광욱 변호사가 TF장을 맡고 있고, 대구지검 1차장을 거친 서영민 변호사(연수원 25기)가 형사대응, 전상오 변호사(연수원 34기)가 공정거래위원회 대응을 맡고 있다.
법무법인 바른은 작년말 영업비밀보호 사건 전문가인 정연택 변호사를 영입했고, 올해 초 IP그룹내 영업비밀보호팀(10명)을 신설했다. 다양한 공학전공 변호사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남연정·김경연 변호사,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한 이재명 변호사를 영입했다. 검찰 출신이 많은 동인은 지난 8월 첨단기술유출 영업비밀보호팀(13명)을 구성했고 대기업 법무를 총괄하던 진욱재, 손성락 변호사를 영입하면서 관련 대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평은 지난해 3월 영업비밀·산업기밀 분쟁 대응팀(18명)을 조직했다. 한국지적재산권변호사협회 부회장인 성창익 변호사, 이소영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가 주로 대응하고 있다.
남정민/안대규 기자 peux@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