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정부 각 부처에 따르면 법제처는 최근 민관합동 ‘행정법제 혁신 운영위원회’를 열고 행정기본법에 담길 뼈대를 확정했다. 행정기본법은 국토 환경 복지 등 전체 국가법령의 92%(4400여 개)를 차지하는 행정법령을 아우르는 기준법이자 기본 매뉴얼로, 지난 7월 국무회의에서 신규 제정키로 의결했다. 법제처는 연말까지 정부안을 확정한 뒤 내년 6월 출범할 21대 국회에 정부 입법으로 제출할 계획이다.
서류만 내면 신고한 걸로 간주
법제처는 행정기본법 초안에 ‘요건을 충족하면 신고 효력은 신고서가 행정청에 도달할 때 발생한다’는 규정을 담았다. 현재 신고 규정이 있는 1290개 법 조항 가운데 휴게음식점 체육시설업 축산물판매업 영업신고 등 810개가 적용받는다.
카페 등 휴게음식점(술을 팔지 않는 음식점)은 임대차계약서 위생교육필증 등 구비 서류와 함께 영업신고서만 내면 곧바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숙박시설·미용실·당구장 개설, 골프장 이용료 변경, 건축물 용도변경 신고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주민등록 전입신고 등 개별 법에서 ‘행정청이 신고서를 접수·수리해야만 효력이 발생한다’고 명문화한 조항은 예외다.
법제처 관계자는 “미용실 당구장 등을 열거나 건축물 용도를 변경할 때 담당 공무원이 별다른 이유 없이 신고서 접수를 늦추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행정기본법이 제정되면 공무원의 ‘몽니’나 자의적 해석으로 민원인이 골탕 먹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당한 기부채납 원천 봉쇄
초안에는 또 ‘30층짜리 빌딩 건축을 승인해주는 대신 땅 1000㎡를 기부채납하라’는 식의 부당 결부(민원인에게 인허가 등 행정 처분과 무관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 금지 규정도 포함됐다. 관청이 인허가권을 가진 ‘갑’의 지위를 이용해 ‘을’인 민원인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못박은 것이다.
관청이 인허가를 조건으로 기업에 해당 인허가 사안과 아무 관련 없는 요구를 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20여 년 전 롯데가 그랬다. 부산시는 2000년 롯데가 제출한 제2롯데월드 건축 승인을 내주면서 ‘철거를 앞둔 영도대교 기념관을 세우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10여 년의 행정소송 끝에 롯데가 승소했지만 그동안 허비한 시간과 비용은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박세원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부당결부금지 원칙이 법제화하면 관청의 부당한 요구를 예방하는 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법제처는 행정기본법에 행정 처분의 일관성을 유지해 행정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예측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내용의 ‘신뢰보호의 원칙’도 담았다.
예컨대 관청이 음주운전으로 적발한 사람에게 벌금만 부과했다면 수년 뒤 면허취소 사유란 걸 알게 됐더라도 취소 처분을 내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해당 운전자는 당시 음주운전에 따른 처벌이 끝났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만큼 비록 당시 법 적용이 틀렸어도 뒤늦게 추가 처분을 내리는 건 행정의 신뢰를 깨는 행위라고 본다는 얘기다.
‘처분 재심사 제도’도 행정기본법에 들어간다. 지금은 행정처분을 받은 뒤 180일이 지나면 민원인이 행정심판이나 소송을 할 수 없지만, 행정기본법이 발효되면 처분의 위법성이 확인될 경우 해당 관청에 재처분을 요구할 수 있다.
오상헌/서민준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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