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뭉개는'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

입력 2019-11-25 17:27   수정 2020-10-25 16:30

마켓인사이트 11월 25일 오후 3시35분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대상과 절차를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한 ‘국민연금 경영참여 목적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지침)’의 법적 정당성을 놓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내용이 헌법 등 상위 법과 충돌하는가 하면, 집중투표제 강제 도입 등 법령에 근거가 없는 제도를 기업에 강요하는 내용을 무더기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으로 도입해야 할 주요 사안을 정부가 공공기관(국민연금) 지침으로 시행하면서 기업 경영에 무소불위로 개입할 근거를 마련하려 한다는 비난도 제기된다.

25일 정부와 재계 등에 따르면 복지부가 마련한 지침이 확정되면 국민연금은 법령을 위반한 기업 등을 대상으로 이사 해임과 정관 변경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지난 13일 공청회를 열어 이 지침을 공개했다. 이달 말까지 확정해 바로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 지침 가운데 15개의 핵심 내용이 상위 법령을 무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기관의 1차 조사 결과(검찰 기소 등)만으로 국민연금이 이사 해임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한 게 대표적이다. 대법원 유죄 판결 전까지 피고인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지 못하도록 한 헌법의 무죄추정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는 게 법조계 의견이다.

기업들이 ‘임기 중 상장사 임원 해임’을 요청하는 주주제안을 거부하도록 규정한 상법도 무시하고 있다. 상법 및 시행령(12조)에 따르면 지분율 3% 이상 주주는 주주총회에 다양한 안건을 제안할 수 있지만 임기 중 임원의 해임, 명예훼손 사항 등을 요구하는 제안은 기업이 거부하도록 했다. 무분별한 주주제안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국회 패싱'하고 집중투표제 강요
"국민연금, 초법적 경영개입 우려"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가이드라인(지침)이 기업들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강요하는 것도 논란을 낳고 있다. 현행 상법(542조의 7)은 기업들이 정관에 ‘집중투표제를 시행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으면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지침은 횡령 등 법령 위반 기업은 물론이고 임원 보수가 과도하거나 부실 배당을 하고 있다고 지목한 기업에 ‘집중투표제 배제 규정을 삭제하라’는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할 때 특정 이사 후보에게 의결권을 몰아줄 수 있는 제도다.

한 상장회사 관계자는 “지침이 확정되면 여야 합의 실패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법안이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에 강제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맘대로 제도 강요

이 지침은 상법에 근거가 없는 제도를 국민연금이 기업에 도입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은 적은 배당 또는 과도한 이사 보수 등을 명목으로 이사회 내에 주주권익위원회, 임원보상정책 담당 위원회, 내부거래 및 내부통제 담당 위원회, 임원후보 추천 및 공시 담당 위원회 등을 설치하도록 주주제안을 할 수 있다. 자산 2조원 이상 기업만 이사회 내에 감사위원회 및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두면 되고 나머지 기구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하면 된다는 현행 상법을 무시하는 내용이란 지적이다. 재계의 한 임원은 “국민연금이 법에도 없는 ‘초법적 기구’를 이사회에 설치하라고 기업들에 으름장을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금사회주의 제도화”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집중투표제 전면 도입, 이사회 내 각종 기구 설치 등은 국회 법률 개정이나 적어도 정부 시행령 개정으로 도입해야 하는데 법령 자격이 없는 국민연금 지침만으로 가능하도록 한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국회를 패싱하고 정부가 기업 경영을 좌우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이사·감사위원 선임 등 사적 경영에 해당하는 사안은 헌법에서 국가 개입을 금하고 있다”며 “민간기업에까지 정부가 나서서 경영을 통제 내지 관리하겠다는 건 연금사회주의를 본격화하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가 연기금의 ‘5% 신고 룰 완화’를 위해 추진하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 작업이 마무리되면 국민연금 지침이 실질적으로 시행령보다 높은 지위를 갖게 되는 것도 논란거리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이사회 등 회사 기구 관련 정관변경은 경영참여 행위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만, 금융위는 시행령을 개정해 ‘국민연금 등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공개하는 경우’에는 정관변경 요구를 경영참여 행위에서 제외해준다는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은 ‘경영참여 신고’를 하지 않아도 기업에 맘껏 정관변경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이 시행령 개정안은 법제처 심사를 앞두고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시행령 단서 조항으로 상위 법이 규정하는 각종 제한 조치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투기세력 가세하면 경영권 방어 차질”

경영참여 지침이 확정되면 국민연금의 무소불위 경영 개입이 가능해지지만 기업들은 대항 수단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민연금 주주제안에 외국계 투기 세력이 가세하면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상장사 가운데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모두 313개에 달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카카오 등 13개 기업은 국민연금과 외국인이 공조할 경우 사내이사를 해임시킬 수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대비해 자사주 매입을 늘릴 수밖에 없다”며 “기업의 투자 여력이 줄어 성장잠재력을 훼손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

이상열/황정환 기자 mustaf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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