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에는 사장이 두 명이다. 우종수 경영관리부문 사장과 권세창 신약개발부문 사장이다. 개량신약 개발에 기여한 우 사장이 한미약품의 현재를 만들었다면 바이오신약 개발을 주도하는 권 사장은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 사장이 손을 대는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마다 한미약품의 미래가 됐다. 이제는 이런 평가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미약품의 바이오신약 꿈이 현실화하고 있어서다. 미국 스펙트럼에 기술수출한 호중구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는 지난달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 절차에 들어갔다. 내년 말 허가를 받으면 한미약품이 개발한 신약이 미국에 진출하는 첫 사례가 된다. 권 사장은 “20여 년간 개발한 바이오신약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 것”이라며 기대를 드러냈다.
신약 개발 꿈 안고 중소 제약사로 이직
권 사장은 한미약품의 바이오 역사와 함께한 산증인이다. 그가 입사했던 1996년 한미약품은 중소 제약사에 불과했다. 연세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그는 석사 학위를 받고 1989년 SK케미칼 전신인 선경인더스트리의 생명공학팀장으로 입사했다. 선경인더스트리에서 7년차가 됐을 무렵 그는 대기업을 떠나 중소 제약사인 한미약품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한미약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권 사장은 경기 성남시 판교에 있던 한미약품 연구센터를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 “건물 외관은 허름했는데 내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최첨단 연구 설비를 갖추고 있었어요. 연구개발(R&D)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역동적인 조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라면 제대로 신약 개발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실제로도 그랬다. 권 사장은 한미약품의 강점으로 도전적인 기업 문화를 꼽았다. “신약 개발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중요한 건 실패해도 손을 놓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죠. 도전에는 많은 리스크가 따릅니다. 한미약품은 실패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그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묻더군요. 그게 신약 개발의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권 사장이 합류한 뒤 한미약품은 본격적으로 바이오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한미약품 연구센터 연구위원으로 입사한 그는 연구원 5명과 바이오팀을 꾸렸다. 당시 연구센터는 30여 명 규모였다. 바이오팀장을 맡은 그는 차별화된 신약 플랫폼 개발에 들어갔다. “한때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도 검토했지만 우리는 R&D 중심 회사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습니다. 설비 투자보다 기술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핵심 정보 공개로 위기 돌파
이때부터 개발한 플랫폼이 랩스커버리다. 랩스커버리는 바이오 의약품의 약효 지속 시간을 늘려 투여 횟수와 투여량을 줄여 효능을 개선하는 기술이다. 권 사장은 10년 이상 연구해 탄생시킨 랩스커버리를 “자식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이 플랫폼과 관련해 출원한 특허만 약 1500개에 달한다. FDA에 허가를 신청한 롤론티스는 최초로 랩스커버리가 적용된 단백질 의약품이다. 신약 허가를 신청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권 사장은 “신약 개발은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력이 총집결된 종합 산물”이라며 “앞으로는 신약 개발의 양과 질뿐만 아니라 속도도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약품의 공격적인 R&D는 국내 제약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족적들을 남겼다. 2015년부터 2년 동안 일곱 건의 대형 신약 기술수출을 성사시켰다. 계약금과 단계별 마일리지는 8조원을 웃돌았다. 유례없는 성과였다. 국내에 바이오붐을 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하지만 축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2016년 9월 베링거인겔하임에 기술수출한 내성 표적 항암신약 올무티닙의 계약이 해지된 데다 늑장공시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구원투수로 2017년 대표에 취임한 권 사장은 투명성과 신뢰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그는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했다. 홈페이지에 신약 파이프라인과 연구개발 진행 상황을 실시간 공개했다. 제약바이오업계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어떤 약물을 개발하고 있는지, 개발 단계가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세세하게 알리지 않는다. 경쟁사가 후속 약물 개발이나 출시 일정을 수정해 방해 공작을 펼칠 우려가 있어서다. 파이프라인이 회사의 경쟁력이자 전략인 셈이다. 권 사장은 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노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해외 제약사들과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시장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에 글로벌 트렌드를 선점한 약물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다국적 제약사들과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R&D는 속도가 경쟁력”
한미약품이 개발하던 지속형 인터페론은 길리어드의 경구용 인터페론이 나오면서 개발이 중단됐다. 주사제에서 먹는 약으로 트렌드가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권 사장은 “R&D는 속도가 경쟁력”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약도 타이밍을 놓치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발 속도를 지체시키거나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없앴습니다. 제가 성격이 급한 A형인데 아내가 A++형이라고 할 정도로 일을 빠르게 추진하려고 합니다.”
권 사장이 취임한 뒤에도 여러 차례 기술수출 계약이 해지되는 시련을 겪었다. 올해 릴리의 경구용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HM71224와 얀센의 비만·당뇨치료제 HM12525A의 권리를 반환받았다. 그는 “신약 개발을 하면서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고 했다. “한미약품의 파이프라인은 같은 임무를 띤 비행 편대에 비유할 수 있어요. 한두 개 추락해도 멈춰설 수 없습니다. 결국 다 같이 가야 합니다.”
권 사장은 30여 개에 달하는 한미약품의 신약 파이프라인 R&D를 총괄하고 있다. 권 사장은 창립 5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2~3개의 글로벌 혁신신약(first-in-class)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내년 글로벌 시장에 나가는 롤론티스가 블록버스터가 된다면 정말 보람될 것 같습니다. 한미약품이 실력을 인정받고 글로벌 신약 개발 회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 한미약품의 'R&D 경영'
매년 매출의 15% 이상 투자
30여개 후보물질 임상 순항
한미약품은 한국 최초의 개량신약, 복합신약, 혁신신약을 탄생시켰다.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며 한국 제약산업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R&D 투자 금액은 1조원을 훌쩍 넘겼다. 해마다 매출의 15% 이상을 R&D에 투자해왔다. 지난해에는 매출 1조160억원의 19%인 1929억원을 R&D에 쏟아부었다. 올 들어서도 3분기까지 누적 R&D 투자액이 1544억원에 달한다.
한미약품은 매출 성장과 R&D 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체 개발 제품을 통해 얻은 수익을 글로벌 혁신신약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한미약품의 혁신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은 30여 개다. 국내 제약업계에서 단일 기업으로 가장 많다.
개발 분야도 당뇨 비만 등 대사성 질환부터 항암, 희귀난치성질환, 자가면역질환까지 다양하다. 신약 파이프라인의 절반 이상은 사노피, 제넨텍, 테바, 스펙트럼, 아테넥스 등 글로벌 제약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개발되고 있다. 한미약품은 랩스커버리를 비롯해 주사용 항암제를 경구용으로 전환하는 플랫폼 기술인 오라스커버리, 하나의 항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타깃에 동시에 결합하는 차세대 이중항체 플랫폼 기술인 펜탐바디 등 독자 플랫폼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신약 후보물질 개발을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경구용 항암 신약 오락솔은 유럽과 미국에서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됐고 랩스커버리 기술이 적용된 당뇨 신약 에페글레나타이드는 다섯 건의 글로벌 임상 3상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권세창 한미약품 사장은 “30여 개 신약 후보물질의 글로벌 임상 연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며 “지속적인 R&D 투자 및 파트너사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권세창 한미약품 사장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1982년 서울 경동고 졸업
△1986년 연세대 생화학과 졸업
△1988년 연세대 생화학 석사
△1989년 선경인더스트리 생명공학팀장
△1996년 한미약품 연구센터 이사
△2009년 서울대 동물자원과학 박사
△2010년 한미약품 연구센터 바이오신약총괄 연구부소장
△2012년 한미약품 연구센터 연구소장
△2017년 한미약품 신약개발부문 대표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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