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은 현실 도피를 위한 도구인 술을 매개로 다양한 삶의 이면을 들춰낸다. 시집은 어느 곳을 펼쳐도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만나게 되는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박시하의 시 ‘어제’는 ‘과거를 잊는 술을 마셨다/사랑한 여자의 남자를 잊었다’며 술을 통해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한다. 기형도의 시 ‘그집 앞’은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노래한다. 박소란의 시 ‘기침을 하며 떠도는 귀신이’는 ‘잔은 또 그렇게 차오를 테지/댓잎에 빙의된 바람도 자리를 찾아 고된 몸살을 다독일 테지’라며 좌절과 위로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인생은 나에게/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정호승의 ‘술 한잔’ 중에서)나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중에서)와 같은 구절은 시가 익숙한 이에겐 편안함을, 낯선 이에겐 설렘을 안겨준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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