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 제언을 쌓아 개간
농촌 양반은 개간의 적지를 골라 제언을 쌓거나 보(洑)를 개설해 논으로 일궜다. 16세기 경상도 북부지방의 양반가에 전하는 20여 종의 상속문서에 따르면 노비 재산의 규모는 적더라도 50명을 넘는 게 보통이며 많게는 300명을 초과했다. 토지 재산의 분포는 더욱 다양한데, 적더라도 200두락(斗落)이며 최대는 2312두락에 달했다. 두락이란 1말(斗)의 종자를 파종하는 면적을 말하는데, 16세기에는 100~120평이었다(1평=3.3㎡). 노비와 토지 재산의 규모는 상속주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상속주가 중앙정부의 관료 출신이거나 그의 아들이면 재산의 규모는 월등했다.
농장은 분산됐어요
양반이 노비 노동을 이용해 토지를 경작한 농사의 단위를 가리켜 농장(農庄)이라 했다. 얕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동(洞)이나 곡(谷)이 농장의 중심을 이뤘다. 동의 가장 안쪽 높은 곳에 기와로 지붕을 인 양반의 저택이 자리잡는다. 그 아래로 좌우 야산 기슭을 타고 노비들의 집이 배치된다. 노비 집의 다수는 여전히 반지하 움집이다. 동 안에는 배추, 무 등 부식 재료와 면화, 마, 저, 칠 등 가내공업의 원료를 위한 채마밭이 조성된다. 동 밖으로는 넓게 펼쳐진 들이다.
제시된 그림은 16세기 경상도 풍산현 갈전리에 자리잡은 안씨 양반가 농장의 상상도다. 동 안은 농장주의 저택, 노비의 초가와 움집, 그리고 채마밭이다. 동 밖은 유명한 풍산들이다. 농장에 속한 논이 이 들에 분포했다.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는 유서 깊은 여자지(女子池)다. 동과 들 사이에 정자가 있는데 안호정(雁湖亭)이다. 안동에서 한성으로 오가는 선비들이 이 정자에서 휴식했다. 노비와 토지가 많은 양반가는 이 같은 형태의 농장을 여러 곳에 분산시켰다. 한 곳에 노비와 토지를 과다하게 집중하면 경영의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농장을 분산시키면 가뭄이나 홍수로부터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머슴과 나누는 비율
농장 경영은 주인이 노비의 노동을 사역하는 방식이었다. 노비에게는 보통 한 달에 1회 식료가 지급됐다. 봄·가을에는 의복 한 벌이 지급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 같은 방식의 경영을 가작(家作)이라 했다. 농장 규모가 커서 가작만으로 감당할 수 없으면 보완책으로 작개(作介)를 행했다. 특정 토지 경작을 특정 노비에게 할당하는 것이 작개다. 작개의 소출은 주인 소유였다. 그 대신 작개를 한 노비에게는 사경(私耕)이라는 토지가 지급됐다. 사경의 소출은 노비 몫이었다. 근세에 머슴에게 연봉을 줄 때 ‘새경’이라 했는데, 그 말의 유래가 사경이다.
이 밖에 주변 농민과 ‘어우리’하는 방식이 있었다. 한자 표기로는 병작(幷作)이라고 했다. 어우리는 한 사람이 토지를 내고 다른 사람은 노동력을 내 합작으로 농사를 지은 다음 소출을 반씩 나누는 관계다. ‘전국의 토지는 왕토’라는 관념이 그런 합작 농사를 성립시켰다고 지적된다. 2011년 충남 회덕에서 나신걸이 부인에게 쓴 한글 편지가 발굴됐다. 1490년대께의 편지다. 나신걸은 군관으로 차출돼 북방으로 가면서 부인에게 전지(田地)를 모두 어우리로 주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어우리는 농사를 직접 지을 수 없을 때 선택하는 관계였다. 양반 농장주도 어우리를 활용했는데, 지배적인 방식은 가작과 작개였다. 어우리가 지배적으로 되는 것은 17세기 후반~18세기부터다.
기억해주세요
농장 규모가 커서 가작만으로 감당할 수 없으면 보완책으로 작개(作介)를 행했다. 특정 토지 경작을 특정 노비에게 할당하는 것이 작개다. 작개의 소출은 주인 소유였다. 그 대신 작개를 한 노비에게는 사경(私耕)이라는 토지가 지급됐다. 사경의 소출은 노비 몫이었다. 근세에 머슴에게 연봉을 줄 때 ‘새경’이라 했는데, 그 말의 유래가 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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