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모펀드(PEF), 벤처캐피탈(VC) 등 투자업계에서 여풍(女風)이 불고 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여성 운용역은 존재 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소한’ 존재였지만 최근에는 주요 굵직한 거래에서 ‘메인 딜 메이커’로 부상하고 있다. PEF 업계에는 신선화 유니슨캐피탈 파트너, 연다예 베어링 PE 상무 등이, VC업계에는 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 안신영 HB인베스트먼트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소비재, 컨텐츠 등 업종 투자에 강점
PEF업계는 여성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은행, 증권 등 금융업계에는 여성 임원이 속속 등장했지만 유독 투자업계만큼은 예외였다. 여성들은 주로 투자 포트폴리오 관리직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딜 소싱부터 펀드레이징, 투자 회수 등 전반의 과정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고된 업무인데다 주로 학연, 지연 등 인맥을 바탕으로 거래가 이뤄지다보니 남성 운용역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운용사들이 10명 안팎의 소수 인원으로 구성되는 영향도 컸다. 최근에는 PEF 업계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다방면의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주요 운용사 곳곳에 여성 운용역들이 포진해 있다.
신선화 파트너는 유니슨캐피탈이 올해 투자 원금 대비 6배의 차익을 거두고 매각한 대만 밀크티 브랜드 공차의 딜 소싱부터 매각까지 과정을 진두지휘한 주인공이다. 식자재 유통회사 구르메 F&B코리아도 투자 1년 만에 기업가치를 두 배 이상 올려 매각을 성공시켰다.그는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와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를 거쳐 2014년 유니슨캐피탈에 합류했다.
2010년 홍콩계 PEF인 베어링 PE에 입사해 10년째 근무 중인 연다예 상무는 현재 회사 내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연 상무는 2013년 로젠택배 인수, 2016년 한라시멘트 인수 및 매각, 최근 인수한 애큐온 캐피탈, 애큐온 저축은행 등 대부분 거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베어링 PE에 합류하기 전에는 모건스탠리에서 IB뱅커로 활약했다.
국내 토종 IMM PE에는 김유진 상무가 있다. 그는 2013년 IMM PE가 할리스 커피를 인수할 당시 딜 소싱부터 인수까지 전 과정을 주도했다. 현재는 할리스 커피 대표를 맡아 직접 경영 일선 현장에서 뛰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를 거쳐 2009년 IMM PE에 합류했다.
신생 PEF 웰투씨인베스트먼트의 이남령 전무도 최근 주목받는 딜 메이커다. 그는 2017년 웰투시에 합류한 뒤 아주캐피탈, 두산엔진, 케이리츠 투자 검토부터 회수까지 전반 과정을 총괄했다.
맥쿼리 PE에서 그린에너지 인수 등을 주도한 이수진 상무, 유니슨캐피탈에서 신 파트너와 함께 공차, 구르메 F&B 투자 실무를 담당한 홍희주 상무, 글로벌 IB 뱅커부터 국내 스타트업 봉봉 대표를 지낸 이력을 가지고 최근 이스트브릿지파트너스에 합류한 박은준 상무 등도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PEF업계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보편화된 게 여성 운용역들이 늘어난 배경으로 꼽힌다. 투자 대상 기업들의 산업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남성 위주의 시각으로 투자 적격성을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 운용역들은 뷰티, 식음료 등 소비재, 컨텐츠 업종 투자에서 뛰어난 감각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다. 최근 일부 기관투자자들은 위탁운용사(GP)들에게 여성 인력 비중을 늘릴 것을 요구하는 흐름도 생겨났다.
업계 관계자는 “PE업계 거래 상당수가 네트워킹 위주로 투자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금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투자할 때 예전보다 검토를 훨씬 더 신중하고 꼼꼼히 해야되는데 여성 운용역들은 재무제표나 산업 전반을 분석하는데 강점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인수나 투자를 고려하는 기업의 여성 대표가 남성보다는 여성 운용역들과 서로 터놓고 얘기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VC업계도 최근 5년간 2배 이상 증가
VC 업계에서도 여성 심사역들이 눈에 띄는 활약하고 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여성 심사역은 2014년 48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두 배 이상 증가한 106명까지 늘었다. 지난해 여성 심사역 비중은 10%를 차지했다. 남성 심사역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수준이지만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최근 주요 VC에 여성 대표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주로 뷰티, 모바일, 육아, 모바일 등 관련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투자에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다.
정신아 대표는 인터넷, 모바일 등 분야 초기 기업 발굴에 선구안을 가진 대표 심사역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올해 들어서는 증강현실(AR), 블록체인, 인공지능(AI) 등 신산업분야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BCG 컨설턴트, 이베이 APAC, NHN 등을 거쳐 2013년 카카오벤처스에 합류한 뒤 지난해 대표 자리를 꿰찼다.
안신영 대표는 1세대 여성 VC 심사역 출신이다. 15년간 업계에 몸담은 그는 엑세스바이오, 아이센스, 모린스 등 바이오, 코아스템 등 다방면 분야에 투자해 골고루 성과를 냈다. SBI인베스트먼트, 대성창업투자를 거쳐 지난해 HB인베스트먼트 수장 자리에 올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원 출신인 황유선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은 정보통기술(ICT), 테크 등 분야 투자에서 대박을 터트렸다. 대표 투자 포트폴리오로는 씨디네트웍스, 뷰웍스, 모비스 등이 있다. 삼성벤처투자, NHN인베스트먼트 등을 거쳐 2014년 컴퍼니케이에 합류했다.
알토스벤처스의 박희은 이사, IMM 인베스트먼트의 문여정 이사. 네오플럭스의 윤소정 이사, 데일리파트너스의 박선영, 김진주 이사, AG인베스트먼트의 전남희 이사 등도 업계에서 이름을 새기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VC 업계 자체가 덜 알려지다보니 여성 심사역들이 극소수였지만 요즘은 채용에 남녀 구분이 따로 없다”며 “요즘은 과거 경력 등 이력을 토대로 실력 위주로 뽑는데 여성들이 더 뛰어난 경우도 많다. 앞으로 여성 심사역들은 계속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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