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훔쳐먹던 '어란' 못 잊어…지리산서 숭어알 말립니다"

입력 2019-12-12 13:19   수정 2019-12-13 10:37

어란은 귀한 음식이다. 숭어, 민어 등 생선알의 핏물을 완전히 빼고 염장한 뒤 바람에 천천히 말리는 '시간의 맛'이다. 한국 일본 대만은 물론 유럽에서도 진미 중의 진미로 꼽힌다. 조선시대에는 궁중 수라상에 자주 올랐다. 일본에선 '카라스미'로, 지중해 연안에선 '보타르가'로 불린다.

어란의 명인들이 전국에 있지만 몇 년 전부터 미식가들 사이에는 ‘양재중’이라는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 잘 나가는 호텔과 일식 레스토랑 셰프가 홀연히 지리산으로 떠나 기존에 없던 순수하고 깨끗한 맛의 어란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가 지난 4일 서울 연희동에 '가을 어란'과 직접 농사 지은 가을 무 등을 들고 나타났다. 요리연구가가 운영하는 '메이 스튜디오'에서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 어란 시식회를 열고 3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어란에 왜 빠져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열 여덟살 때 요리를 시작해 호텔 주방 막내 시절 비싼 도시락에 손톱 만큼 올라가던 어란이 너무 궁금해 몰래 훔쳐먹곤 했다"며 "그 작은 조각에 수 많은 맛이 담겨 있어 도저히 못 잊겠더라"고 했다. 타워호텔과 정통일식집 조리장 등을 거친 그는 더 배우고 싶은 열망에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어 단어 하나 모르고 떠난 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설거지와 재료 다듬기부터 시작해 긴 시간 수련했고, 최고의 맛을 찾아 헤맸다. 미식이 발달한 일본에서도 어란, 해삼창자, 성게알 등은 3대 진미로 꼽힌다. 참기름을 발라 말리는 한국식 어란, 간장을 발라 말리는 일본식 어란 등을 다양하게 연구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타츠미스시 등 고급 일식당을 책임지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에도 어란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회 뜨고 남은 제철 숭어의 알을 염장하고 말리면 기업 회장 등 단골 손님들이 매년 그의 어란을 찾았다.

어란은 1g당 1000원이 넘는다. 달걀 1개(50~60g)의 크기가 5~6만원을 넘으니 고가의 식재료다. 이날 양재중 어란의 시식회에는 30여 명의 신청자들이 모였다.

그는 봄에 만든 참숭어 어란과 가을에 만든 가숭어 어란의 차이 등을 설명했다. 봄에 잡히는 참숭어는 진흙뻘에서 나와 살이 기름지고 알도 더 눅진한 맛을 자랑한다. 가을부터 겨울철 강 하구 유역에서 많이 잡히는 가숭어는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그는 "어란 초보자들은 가을 어란을, 입안에 오래 남는 진득함을 좋아하면 봄 어란을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한 참가자가 "어란을 어떻게 먹는 게 가장 좋냐"고 묻자 "파스타 등으로 많이 해서 드시지만, 어란 슬라이스를 입천장에 붙여 살살 녹여가며 본연의 맛을 느끼는 게 가장 맛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어란을 만드는 방식은 독보적이다.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재료를 찾는 것. 참숭어의 산란기인 4월 말부터 5월 말까지는 수산시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봄에 1t 가량을, 가을에도 소량의 숭어 알을 공수한다. 실핏줄을 예리한 칼 등으로 모두 제거한다. 피를 완전히 빼지 않으면 부패하거나 비린내가 나기 쉽다. 소금에 파묻어 길게는 네 시간까지 충분히 절인 후 2주에서 3개월 간 말린다. 이 때 부피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양 셰프는 "아침 저녁 매일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가며 매일 애지중지 말려야 하는 작업"이라며 "말리는 동안 첨가물 없이 약 50번 정도 문배주로만 닦아낸다"고 했다. 전통방식인 참기름 대신 문배주를 쓴 그의 어란은 맛이 더 깔끔하고 색은 투명한 홍시에 가깝다.















양 셰프는 봄과 가을에 어란을 만드는 일과 함께 우리 먹거리 알리기와 연구,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4월 말에는 '어란 클래스'를 여는데 2~3일이면 신청이 마감된다. 우리장만들기, 밥짓기운동 등을 통해 좋은 식재료의 가치를 알리는 일에도 바쁘다.

"뛰어난 셰프들이 많지만 요즘은 뭔가를 항상 더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좋은 셰프는 식재료가 가장 맛있는 때를 알고, 그 외의 것들은 덜어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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