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과거'에서 '미래'를 보는 경영자였다. 1995년 그룹 경영권을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준 뒤 충남 천안시 성환읍에 있는 연암대학교에서 농업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한국의 미래는 결국 '농·축산업'에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1974년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고등기술학교)를 설립했다. 농촌으로 돌아가 농·축산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다. 설립 당시 입학금은 물론 숙식과 그 밖의 모든 비용을 학교에서 제공해 화제가 됐다. 농·축산업에서 미래를 발굴하려는 노력은 각 사업 영역에서도 이어졌다. 2016년 LG화학이 동부팜한농을 5000억원에 인수하고, LG화학은 그린 바이오를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2003년 정구학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연암대학교(당시 연암축산원예대학)에서 구 명예회장을 만났다. 은퇴 후 명예회장의 일상을 살펴보고 그의 인생 철학 등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두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hr style="margin: 25px 0px; border: 1px solid rgb(195, 195, 195); border-image: none; display: block !important;" />
구자경 LG 명예회장(78)은 1995년 그룹 경영을 장남 구본무 LG 회장에게 물려준 뒤 충남 천안시 성환읍에 있는 연암축산원예대학에서 버섯 재배로 소일하고 있다.
연암축산원예대학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LG창업자인 선친 구인회 회장의 호인 연암(蓮菴)을 따서 세운 학교.
구 명예회장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여기서 숙식한다. 지난 10일 어렵게 구자경 명예회장을 만났다. 버섯을 재배하면서 시골농부처럼 살아가는 무욕양생(無欲養生)의 행복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일까. 여러 경로로 수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별 수 없었다. 사전 연락을 생략한 채 무작정 연암축산원예대학으로 쳐들어(?)갔다. 연암축산원예대학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전 11시반쯤. 구 명예회장을 찾아 대학구내에 있는 사택 주변을 서성거렸다.
대학 사람들이 '별장'이라고 부르는 사택은 정원 앞에 양잔디가 넓게 깔려 있는 것을 빼고는 일반 주택과 다를게 없었다. 농장 사람들과 한참동안 승강이 끝에 농장건물 한 켠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말이 사무실이지 공사현장의 허름한 사무소와 다를 바 없었다. 대기업 그룹의 명예회장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너무 수수했다.
주식시세표 화면이 모니터에 떠 있는 조그만 컴퓨터 한 대, 책상 하나와 5명이 앉을 만한 허름한 소파, 펼쳐진 신문. 영락없는 서울 청계천 상가의 사무실 풍경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구 명예회장을 위해 그룹에서 설치해 주었다는 대형 PDP TV만이 그나마 은퇴한 재벌회장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두꺼운 청색 반팔셔츠에 어깨 멜빵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허, 뭐하러 왔어."
"버섯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회장님 근황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아서요."
이렇게 시작한 인터뷰는 오후 2시반까지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중간에 시골밥상을 연상케 하는 맛있는 점심도 얻어먹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시골 할아버지처럼 들려줬다.
-버섯 키우시는게 재미있나요.
"글쎄, 안해보면 모르지. 버섯은 암 예방에 아주 좋아."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거 또 그 질문이구먼.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도 물어봐서….
오늘(목요일)은 늦잠을 잤어. 보통 저녁 7시 TV뉴스 보고 잠들었다가 새벽 대여섯시면 일어나는데 오늘은 8시반이 돼서야 일어났지 뭐야. 어제 오전에 버섯일을 하고 오후에 대학구내(20만평)를 구석구석 너댓시간 돌아다녔더니 피곤했나봐."
-그 넓은데를 걸어서 다니세요.
"골프 전동카를 타고다니기도 하고 내려서 걷기도하고 그러지 뭐.
그제(화요일)는 곤지암CC(LG에서 경영)에서 아는 사람들과 골프를 쳤고, 월요일에는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로 나가 회사에 대해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보고, 또 일요일엔 서울 성북동 집으로 가서 안사람(하정임 여사)을 만나고. 하여튼 일주일이 금방 가는 것 같아."
-골프는 대개 누구와 치시나요.
"단오날에 처음 만났다고 해서 '단오회'라는 20년된 모임이 있어. 재계 원로들(김각중 경방 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김상홍 삼양사 명예회장 등)이 회원이지. 김각중 회장과는 그 양반이 지난 2월 전경련 회장을 그만둔 뒤에 골프를 두 번이나 쳤어. 종친회인 능성구씨(綾城具氏) 대종회 사람들과도 어울리지(그는 대종회장을 8년째 맡아오고 있다). 전동카트를 타고 18홀을 다 돌지."
-(신문을 가리키며) 신문을 보시나요.
"물론이지. 돋보기를 들고 매일 사설까지 꼼꼼히 읽어보지. (네모난 뿔테 안경을 수십년째 쓰고 있는 그는 신문을 볼 때 손잡이 돋보기까지 동원했다)"
-신문기사를 보면 걱정되시는 건 없나요.
"허허, 내가 뭐 얘기할게 있나. 그런데 말야, 우리 대학에 입학생이 줄어 문제야."
요즘의 시끌벅적한 정치ㆍ경제에 대한 코멘트를 기대했으나 구 명예회장은 연암축산원예대학과 농촌 얘기에 20여분이나 할애했다.
-학교운영은 잘 되는 것 같습니까.
"과거 공화당 시절 지은 이 학교가 올해 개교 29년을 맞았어. 예전에는 우수한 학생이 많이 들어왔었어요. 싼 학비에 무료 기숙사를 제공하니 70년대엔 인기가 높았거든. 요즘엔 웬 대학이 그리 많은지. 이 곳 천안과 평택 근방에도 20개가 넘어."
-구본무 LG 회장이 지난 3월 지주회사 출범이후 '일등 LG'와 '브랜드 경영'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난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아. 얘기만 듣는 편이지요."
-주로 어떤 얘기를 누구한테 들으시나요.
"월요일에 서울에 올라가면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LG연암문화재단과 LG복지재단 업무를 챙기지. 또 강유식 구조조정본부장(정식 직함은 ㈜LG의 부회장)에게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궁금했던 얘기를 물어봅니다.
(구 명예회장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대형 PDPTV로 뉴스를 틀어놓았으며 점심식사와 커피타임에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엔 스트라이크(파업)가 일어난 LG화학과 하나로통신 증자문제가 불거진 통신부분에 대해 들어봤어요."
-현 정부에서 친노조 성향을 보이니까 노조가 강하게 나온다고 보시나요.
"……(한동안 침묵). 허허 (안경을 만지며 쓴 웃음) 곤란한 질문을 하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8ㆍ3 사채동결 조치까지 취해가며 기업들의 사기를 북돋워줬는데 요즘은 기업인들의 사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노동부도 너무 노동조합을 이해하는 쪽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지나간 얘기좀 해주세요.
"지난 68년께는 우리 기업들이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때 김용완(김각중 경방 회장의 선친) 당시 전경련 회장이 박 대통령을 찾아가 '기업들이 다 망하게 생겼다'고 호소했지. 결국 박 대통령이 8ㆍ3 조치를 결행해 오늘날 우리 기업이 살아남고 이렇게 커지게 된 겁니다. 한국경제신문에서 과도한 사회복지정책으로 제조업 붕괴 위기에 처한 독일의 사례를 보도한 것은 아주 잘한 것 같아. 기사를 보니 지금의 독일은 '옛날 독일'이 아니더군."
-LG가 전경련에 서운한 감정을 많이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지난 정권 때 있었던 반도체 빅딜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정부가 나서서 구조조정을 주도했는데 전경련이 당시 무슨 힘을 썼겠어. 나중에 손병두 당시 전경련 부회장이 두번이나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난 은퇴했는데 뭘 알겠어'라며 돌려보냈지."
-지주회사로 바뀐 LG의 미래상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자, 차나 마시며 얘기해요."
정리=고재연 기자/인터뷰 원문=정구학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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