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를리치의 독특한 대형 설치작품 여덟 점을 보여주는 ‘레안드로 에를리치:그림자를 드리우고’전이 17일 북서울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에를리치는 엘리베이터와 탈의실, 정원, 보행로, 수영장 등 일상의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관객 참여형 전시를 선보여왔다. 작품 대부분은 거울과 유리, 그림자 등의 이미지를 이용한 착시 현상을 통해 인식의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뜨리며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인식’이라는 주제에서 나아가 ‘주체’와 ‘타자’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잃어버린 정원’이란 작품에서 작은 정원을 바라보는 관람객은 정원 속 식물들이 아니라 그 안을 지켜보는 정원 밖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교묘하게 설치된 거울을 통해서다. 원래 보고자 했던 정원의 모습 대신 발견하는 자기 모습을 통해 관람객은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에를리치는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통해 인식하는 주체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타자의 본성 역시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며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두 개의 대상을 구분 짓는 경계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가변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에를리치가 특별 제작한 ‘탑의 그림자’는 석가탑의 또 다른 이름인 무영탑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그의 인기작인 ‘수영장’의 구조를 큰 틀에서 좀 더 발전시켰다. 수면을 기준으로 상하 대칭을 이룬 두 개의 탑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실제와 환영,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탑 위에서 수면을 바라볼 때와 마치 물고기처럼 수면 밑에서 위를 올려다볼 때 관람객이 경험하게 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전달한다.
전시 마지막 공간인 프로젝트 갤러리2에 있는 ‘구름(남한, 북한)’도 인상적이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고 단순히 아홉 개의 프린트된 유리판을 보면 마치 무의미한 형태로 떠 있는 구름을 보게 된다. 하지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90도로 꺾어 바라보면 구름 모양이 갈라진 남한과 북한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에를리치는 “구름은 바람에 따라 흩어졌다 모이면서 형태가 만들어진다”며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해 상반된 시스템으로 존재하면서도 주변 정세에 따라 관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남북한의 모습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소재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31일까지.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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