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고개 드는 '기본소득'…AI시대 필연인가, 비현실적 환상인가

입력 2019-12-17 17:23   수정 2019-12-18 00:26

이제는 ‘찻잔 속 태풍’을 넘어섰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직업과 노동의 종말’에 대비해 ‘보편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내외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이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그 배경에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고 소득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깔려 있다. 당장 2021년부터 ‘1인당 월 30만원’ 지급을 시작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문제는 ‘무슨 돈’으로 주느냐다. 기본소득은 AI 시대에 필연적인 귀결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현실적인 환상일까.

기본소득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개념이 아니다. 그 원조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년)를 꼽는다. 모어는 여행자 라파엘 논센소의 입을 빌려 도둑질 외에 살길이 없는 이들에게는 엄벌보다 ‘최소소득’을 주는 게 낫다고 설파했다. 고대 로마제국이 매달 밀 30㎏을 주고 공공서비스를 거의 공짜로 제공했던 ‘빵과 서커스’에서 그 원형을 찾기도 한다.

빈곤층 공적 부조는 19세기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과 함께 현대 복지국가의 기본 틀이다. 하지만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하던 20세기에는 별문제 없던 복지국가 모델이, 고령화와 저성장의 21세기 들어 존속 자체가 의문시된다. “20년 내 미국의 일자리 47%가 사라진다”는 영국 옥스퍼드대의 ‘고용의 미래’ 보고서(2013년)와 ‘알파고 쇼크’(2016년)까지 더해져 미래에 대한 공포를 한껏 증폭시켰다.

불안한 복지와 불확실한 미래가 기본소득 주장을 뒷받침하는 토대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더 벌어질 소득양극화에 대처할 뿐 아니라 복잡한 복지시스템을 단순화해 누수를 막고, 행정비용을 절감하며, 최저생계를 해결해 오히려 근로를 유인하는 등 장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국내 복지제도는 워낙 복잡해 다 알기가 어렵고, 일을 하면 혜택이 끊어져 되레 일할 의욕을 꺾는 문제도 있다. ‘송파 세 모녀’ 같은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모두에 조건 없이 현금을 주자"

하지만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기본소득의 전제가 기존 복지제도를 대체하자는 것인데 이를 없애려면 수혜집단의 반발과 첨예한 사회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전 국민에게 똑같은 금액을 주면 격차 해소 효과가 없고, 수백조원의 엄청난 재원이 들어 증세에 따른 조세저항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일을 안 해도 현금을 주는데 근로의욕이 높아질지 의문이고, 한 번 시행하면 되돌릴 수 없는 위험성도 크다. 정치적 합의가 어렵다는 얘기다.

유럽의 기본소득 논의는 30여 년의 역사가 있지만 최근 2~3년 사이 스위스, 핀란드의 실험이 세계 이목을 끌었다. 스위스는 월 300만원을 주는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76%의 반대로 부결됐다. 1인당 소득 8만달러대 국가에서 살인적 물가를 고려할 때 실효성이 낮고, 전 국민 지급 시 연간 재정지출의 70%가 든다는 게 부결 사유였다. 핀란드는 실업자 2000명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이 근로의욕을 높인다’는 가설을 검증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고, 역시 재원이 걸림돌로 지적됐다.

한동안 잠잠하다 올 들어 미국 민주당 대선경선 후보 앤드루 양이 ‘모든 성인에게 월 1000달러(약 170만원) 지급’ 공약을 내놓으며 다시 관심을 끌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로봇세(稅)를 주장했고,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도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면 기본소득은 “빈곤층에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하고, 이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란 구상”인 셈이다.

이재명·박원순부터 허경영까지

국내에서도 기본소득 도입 주장이 진보좌파 진영 정치인을 중심으로 점점 커지고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가장 적극적이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청년수당 등이 부분 기본소득의 성격을 띤다.

특기할 점은 허경영 전 민주공화당 총재가 ‘국가혁명배당금당’을 창당해 내년 총선에 비례대표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는 기혼 남녀에게 월 150만원의 국민배당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황당해 보이지만 그의 ‘노인기초연금 월 70만원’ 공약이 나중에 실제 정책으로 채택됐다는 점에서 마냥 무시할 게 아니라는 반응도 나온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제도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장기간 기본소득 실험을 해본 적도 없어 그 효과와 파장은 검증되지 않았다. 재정위기를 겪은 이탈리아가 올 들어 빈곤층 500만 명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했지만,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이다. 다만 인도, 나미비아 등은 일부 빈곤탈출 효과가 나타났다. 복지랄 게 없어 기본소득의 장점이 부각됐지만 확대하기에는 재원 확보가 결정적 난관이다. 미국 알래스카주처럼 막대한 석유 수익이 있으면 몰라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인구 1000만 명 이하 유럽 부국들은 복지 비효율과 근로의욕 저하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검토한 반면, 개도국들은 절대빈곤 탈출을 실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구 5000만 명에 ‘저부담-중복지’ 수준인 한국에서 기본소득 도입은 시기상조이고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논의 수준도 걸음마단계이고, 정치권은 기본소득을 기존 복지에 더 얹어주는 ‘추가복지’쯤으로 여긴다.

현실적으로 재원도 감당하기 힘들다. 민간연구소 LAB(랩)2050이 내놓은 ‘국민기본소득제 시나리오’에 따르면 2021년 1인당 월 30만원 지급 시 187조원, 2028년 65만원을 주려면 405조원이 소요된다고 한다. 연구소는 비과세·감면 정비, 재정 구조조정, 복지 일부 축소·폐지 등으로 증세 없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치적 합의가 가능할지 의문이고, 재원 확보를 너무 낙관했다는 비판도 있다.

기본소득은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쟁점이 복잡다기하다. 먼저 기존 제도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근로자 절반이 면세점 이하이고, 한없이 경직된 노동시스템 아래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이 불가능하다. 연금·복지·비과세·현물지원 제도 정비도 필수다.

단순해 보여도 쟁점은 복잡해

찬반 논란이 좌우이념 대립인 것만도 아니다. 좌파진영은 ‘1 대 99 극복 대안’이라고 주장하지만, “빈곤층 복지 강화가 먼저”라며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파에서도 반대의견이 더 많지만 ‘돈먹는 하마’인 복지제도를 마냥 늘리기보다 이를 대체한다는 전제 아래 기본소득이나 ‘음(-)의 소득세’를 검토해보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한 음의 소득세는 소득과 조세를 일원화해 저소득층에 마이너스 세금(보조금)으로 보전해주는 것으로, 기본소득보다 격차 해소 효과가 크다. 양측의 접근 방법은 반대여도 접점이 있는 셈이다.

기본소득론 주장의 근거인 ‘기계의 일자리 대체’도 아직은 논란거리다. 30년 전에 유튜버, AI 개발자 같은 직업을 상상하지 못했듯이, 2050년에 어떤 직업이 등장할지 알 수 없다. 좋든 싫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은 눈 쌓인 경사면에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커져갈 것이다. 지금으로선 맹목적 환호도, 무조건적인 배척도 경계해야 할 때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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