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향락에 경종 울린 타키투스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98년 저술한 《게르마니아》는 현존하는 유일의 게르만족에 대한 인류학적 기록이다. 라틴어 원제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De Origine et situ Germanorum)》다. 현재 독일을 포함하는 지역인 라틴어 ‘게르마니아(Germania)’는 영어 ‘독일(Germany)’의 기원이 됐다.
타키투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두려운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어떤 족속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여행자와 상인들이 남긴 글과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등을 참고해 책을 저술했다. 게르만족의 제도, 관습, 사회상, 부족 등을 46장(章)으로 나눠 실었다. 책에 소개된 게르만족은 80여 부족에 달한다.
당시 로마는 최전성기인 ‘5현제(五賢帝) 시대’였지만 사치향락이 팽배했다. 타키투스는 향락에 빠진 로마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주적인 게르만족의 명예 존중, 용맹, 충성심을 자세히 소개했다. 로마 지배를 거부하고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게르만족을 부각시켜 로마인의 나약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명예를 중시하는 게르만족의 상무(尙武)적 특성은 주목할 만하다. “주군이 전사했는데 부하가 살아서 싸움터를 떠난다는 것은 평생의 치욕이자 수치다. 부하들이 주군보다 더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주군의 치욕이 된다. 서로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타키투스는 무기가 열악한 게르만족이 강대한 것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여자와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며 비명을 지른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여자들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적군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포로가 돼 겪게 될 끔찍한 일들을 생생하게 묘사해 전사들의 항전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게르만족은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다.”
게르만족은 전쟁과 처벌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도 명예를 중시했다. “왕과 장군은 전제적 권한이 없다. 평소 생활과 전투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권위를 인정받는다. 겁쟁이와 혐오스런 짓을 한 자는 머리 위에 바자(수수깡 등을 발처럼 엮은 물건)를 씌운 뒤 늪에 빠뜨린다. 명예를 깨뜨린 자들의 시체를 남기는 것도 수치로 여겼다.”
게르만족은 평등의식이 강했고 생활풍습이 비교적 건전했다. “게르만족은 농노(農奴)제로 유지되는 로마와는 달리 부족민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자유인이다. 일부일처제를 철저히 지키고 향락적 문화를 배척한다.”
《게르마니아》는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5세기 이탈리아 수도권에서 사본이 발견돼 역사에 다시 등장했다. 1000년 넘는 시간적 간극 탓에 《게르마니아》를 있는 그대로 읽으면 사실과 오히려 멀어질 수 있다. 타키투스는 로마 국경 밖인 라인강 너머 지역을 ‘게르마니아’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게르만족’으로 표현했다.
정치에 악용된 역사와 고전
하지만 게르만족은 다양한 민족을 통칭한다. 인류학적으로 앵글로색슨족과 프랑크족 등은 ‘서(西) 게르만족’에 속한다. 반달족과 고트족은 ‘동(東) 게르만족’,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족은 ‘북(北) 게르만족’에 속한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게르마니아=독일’ ‘게르만족=독일’과는 다르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크레브스는 2012년 《가장 위험한 책》에서 《게르마니아》를 ‘역사적으로 가장 오독(誤讀)된 책’으로 평가했다. 교황 비오 2세는 십자군 원정에 현재의 독일 지역 국가들을 동원하기 위해 ‘충성스럽고 용맹스런 게르만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계몽사상가들은 전제군주제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인 게르만족’을 띄웠고,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나폴레옹에 정복당한 독일 민족을 결집시키기 위해 ‘우수한 전통을 가진 게르만족’을 앞세웠다. 나치 독일은 ‘게르만족 지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이념적 근거로 삼았다. 역사와 고전(古典)이 정치적으로 악용된 대표적 사례다.
“19세기 초반까지 독일은 오로지 정서상에서만 존재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느슨한 테두리 안에 존재한 수백 개의 국가들 간에는 정서적·정치적 결속력이 부족했다. 단일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게르마니아》다.”(크레브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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