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인생 사진’
‘어디가 제일 좋아요?’ 베트남 여행 고수들은 이렇게 답한다. ‘10년 전 다낭’ ‘중국 관광객이 몰려 오기 전 냐짱(나트랑)’…. 배낭여행객의 성지로 알려진 북부 고원의 사파, 최대 휴양섬 푸꾸옥도 돈을 좇는 투자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닌투언은 아직 난개발의 때가 묻지 않은 베트남의 몇 안 되는 관광지다. 카이트서핑을 즐기는 몇몇 청춘과 베트남에서 겨울을 나려는 러시아 사람들 정도가 이곳을 찾는다.
닌투언 여행은 남동부의 관문인 깜라인국제공항에서 시작한다. 대부분 여행객은 공항 북쪽에 있는 냐짱을 향하지만, 닌투언으로 가려면 남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공항을 나서자 한적한 어촌마을 한쪽에 골조만 남은 오래된 프랑스풍 건물이 나타났다. 시토수도원이다. 프랑스 식민 시절, 성직자들이 살던 곳이다. 닌투언의 성도인 판랑탑짬으로 가는 도로에서도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다. 가톨릭은 닌투언의 주요 종교 중 하나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드라이브 코스는 닌투언 여행의 백미다. ‘하늘 사원’이라는 뜻을 가진 누이쭈아국립공원이 호위하듯 여행객을 맞는다. 2000ha에 달하는 산악 지형을 끼고 구절양장 도로를 달리니,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다. 대관령과 남해 다도해를 합쳐 놓은 듯하다. 베트남 남동부 바다는 섬이 많은 특성 덕에 해안선이 단조롭지 않아 보는 맛이 좋다. 푸른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진군하듯 밀려 오는 모습은 한참을 봐도 질리지 않는 장관이다.
한적한 도로 곳곳엔 사진 찍기 좋은 명소들이 마련돼 있다. 그중에서도 빈히만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가 압권이다. 청량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산임해(背山臨海)의 한가로운 어촌 마을을 카메라 앵글에 가득 담아본다.
청정 에너지의 도시 닌투언
닌투언 여행이 즐거운 건 베트남의 다채로운 자연의 보물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다. 누이쭈아국립공원에 있는 항 자이가 대표적이다. 1만8000년 전의 산호초가 굳어 암석화된 지형으로, 지름이 50m를 웃돈다. 썰물 때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면 마치 그 모습이 수백, 수천 개의 촛불을 꽂은 거대한 케이크 같다.
산호초 암석에 한참을 감탄하다 뒤를 돌아보니 누이쭈아산맥 끝자락이 바다와 만나 만들어진 기암괴석들이 여행객을 반긴다. 단단한 화강암이 바닷바람에 깎이고 깎여 자연의 조각품으로 변신했다. 새를 닮은 것도 있고, 거북 형상을 한 거대한 돌무더기도 있다. 누이쭈아국립공원은 1000여 종의 독특한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다. 그중에서도 바다거북이 이곳 명물이다. 항 자이 인근 한적한 해변을 관찰하다 보면, 바다로 돌아가는 새끼 바다거북을 만날 수도 있다.
누이쭈아를 지나 남부 해안도로를 따라 30분가량 더 달리면 바다쪽으로 뾰족하게 돌출된 지형에 도달한다. 무이 징이다. 이곳에선 영겁의 시간이 만든 자연의 예술품인 거대 모래 언덕을 감상할 수 있다. 남부 해안 휴양지로 유명한 무이네의 사구(砂丘)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장대하다. 매년 4월 무렵 오토바이경주대회가 치러질 정도다.
무이 징의 모래언덕을 가로질러 산을 넘어가는 트레킹 코스도 있지만, 갈 길 바쁜 여행자에겐 언덕 초입에 있는 거대 돌무지 위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100명 넘게 앉아도 될 만큼 넓은 돌판에 집채만 한 둥근 돌들이 서로를 의지한 채 절묘하게 서 있는데, 설악산 흔들바위 못지않다. 이곳에 서면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 만큼 강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다.
닌투언의 바람은 베트남에서도 소문난 천연자원이다. 대규모 풍력 발전 단지가 조성돼 있을 정도다. 이 바람이 세계 카이트서핑 마니아들을 불러들인다. 카이트서핑은 돛 역할을 하는 대형 연을 몸에 연결한 채, 바람을 이용해 바다 위를 스키 타듯 질주하는 해상 스포츠다. 워낙 강풍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속도감이 아찔하다. 바람을 이용해 위로 4~5m를 올라가는 서퍼들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아드레날린도 솟구친다.
명사십리 해안길을 걷다 보면…
판랑탑짬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과거 참파왕국의 숨결이 살아 있는 닌투언의 성도(省都)는 바다와 가까운 조용한 도시다. 하노이 호찌민 같은 대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한적함이 여행자의 피로를 줄여준다. 도심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해변에서 닌쭈 해변까지 약 4㎞의 산책길은 닌투언의 명사십리(明沙十里)라 할 만하다. 곳곳에 방풍용 해송(海松)을 심어 놔 산림욕을 즐기는 듯, 기분이 상쾌하다.
이곳의 해변은 일출 명소로도 유명하다. 멀리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면, 닌투언 사람들은 저마다 허리에 튜브를 끼고 바다 수영을 즐긴다. 관광객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훨씬 많다. 아직 때 묻지 않은 곳이라는 증거다. 바다 위에 점점이 부표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4, 5성급 리조트들도 대부분 닌쭈와 빈선을 잇는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판랑탑짬엔 이렇다 할 고층 건물이 없다. 그 덕분에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도 시야가 탁 트인다. 하늘이 이렇게 넓었던가, 새삼 놀라게 된다. 이 도시에서 저녁을 맞게 된다면, 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중산꼬뜨라는 이름의 사찰에 올라가보자.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은 어떤 인상주의 화가도 화폭에 그대로 담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가득하다.
판랑탑짬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20여 분가량 나가면 참파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11세기 초 참파왕국을 지혜롭게 다스렸던 포클롱가라이 왕을 기리는 사원이다. 힌두교의 상징인 시바신이 새겨진 중앙 탑은 매년 닌투언의 참파족들이 제례를 드리는 종교 성지다. 붉은 벽돌을 이용해 탑 모양으로 쌓은 참파사원은 베트남 중부 다낭, 호이안에서부터 남동부까지 고루 분포돼 있다. 등불 도시로 유명한 호이안만 해도 과거 참파왕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다. 닌투언에도 3600여 명에 달하는 중국인(화족)이 군집해 살고 있다. 광둥성 등 중국 남부 상인의 후예들이다.
닌투언의 내륙도 해안 못지않은 경이로운 풍경을 갖고 있다. 차창 밖으로 관목과 선인장으로 덮인 바위산엔 바람이 만들어냈을 법한 신기한 형상의 돌들이 줄줄이 서 있다. 바닷가 염전과 포도밭을 지나 좀 더 닌투언의 속살로 들어가면 황무지를 떼지어 가는 양과 소, 염소 무리가 여행자를 반긴다. 닌투언은 대자연이 선사하는 종합 선물세트다.
닌투언=글·사진 박동휘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여행정보
닌투언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낯선 여행지다. ‘시골’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교통편이 다소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선 냐짱 여행 갈 때 이용하는 캄라인국제공항에서 내려 육로를 이용하면 된다. 이런 이유로 닌투언 여행을 처음 간다면 냐짱과 묶어서 계획을 짜는 게 좋다. 냐짱에서 렌터카를 이용해 남부 해안도로를 일주하고, 참파 유적지까지 다녀오는 데 하루 정도면 충분하다. 닌쭈 비치의 가성비 좋은 리조트에서 하루를 묵는다면 전날 오후쯤 도착해 중산꼬뜨의 석양을 보고, 다음날 여유 있게 닌투언을 즐기면 된다.
판랑탑짬 시내엔 닌투언에 거주하는 주요 민족의 생활상을 담은 박물관도 마련돼 있다. 베트남 중남부의 고원 도시인 달랏과 연계해 여행하는 것도 좋다. 닌투언은 달랏과 냐짱의 중간쯤에 있다. 아직 외국인 여행자들이 드문 곳이다 보니 다양한 음식과 식당을 찾기 힘들다는 건 닌투언 여행의 단점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관광지 물가 걱정 없이 현지 음식을 즐길 수 있어서다.
바닷가인 만큼 해산물이 즐비하다. 빈히 수상마을에 있는 선상 해산물 식당은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닌투언 내륙엔 양과 염소를 방목해 키우는 목장이 꽤 있다. 그 덕분에 육류 요리도 다양한 편이다. 닌투언의 또 다른 특산물로는 포도와 소금을 꼽을 수 있다. 포도농장 투어는 주요 관광 상품 중 하나다.
최근 닌투언은 풍력, 태양광 등 친환경 에너지 시설을 견학하려는 비즈니스 투어로도 주목받고 있다. 닌투언은 베트남을 통틀어 바람이 가장 강한 곳이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