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이 벽화들은 마을 사람들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는지 되묻게 된다. 어떤 마을에는 긴 벽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 놓았다. 아무리 명작을 본떠 그렸어도 사는 이의 삶과 무관하면 무심한 벽화다. 집과 골목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단숨에 희화화해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벽화 그리기는 퇴락한 주거지 골목을 개선해 준다는 사업들이다. 이렇게 해서 전국에는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벽화마을이 생겼다. 부산만 해도 벽화마을이 40개나 된다. 소외지역의 생활환경을 개선한다며 마을을 놀이공원처럼 만들어 버렸고, 많은 관광객이 이런 치장을 보려고 마을에 모여들었다. 미관을 향상시킨다며 짧은 기간에 서로의 생각을 베꼈는데도 야외미술관과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느니, 벽화가 주민들의 삶에 스며들었다느니 하며 서로 칭찬해준다. 그러나 이런 벽화는 살고 있는 집 벽의 물성을 페인트로 단숨에 지워버려 놓고, 사람들은 이를 대단하지 않게 여긴다. 정말 잘못된 문화의식이다.
‘mural village’(벽화마을)라고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우리나라 사례만 잔뜩 나온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용어가 ‘포촘킨 마을’(Potemkin village)이다. 실상과는 무관한 전시용 이미지의 마을을 가리킨다. 18세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며 지역을 방문할 때 그 지역의 책임자 포촘킨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짜 마을과 건물을 강변에 지어놓은 데서 생긴 말이다.
사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체기능이 퇴화하며 노화한다. 마찬가지로 암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흙으로 변해간다. 풍화(風化)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건축물은 풍화하며 ‘늙어가게’ 돼 있다. 이렇게 해서 풍화는 시간의 흐름을 건물에 새겨 넣는다. 건축은 마감으로 끝나지만 풍화로 이렇게 다시 마감된다. 빗물은 환경이고 먼지도 환경이다. 빗물을 따라 씻겨 내려간 자취도 환경의 자취다. 그러니 빗물로 씻겨 내려간 흔적을 벽화 작업을 통해 다른 이미지를 입히는 것은 환경의 자취를 지우는 불순한 행위다.
오래돼 때 묻은 회색 콘크리트나 시멘트 블록이 보기 싫다고 벽화를 열심히 그리고는, 동네가 새로 태어났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집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작은 균열이 본래의 재료에 끼어들고 그 사이에 잡초도 생겨난다. 벽화는 이런 시간을 단숨에 지워버린다. 그렇지만 건축물 재료와는 비교도 안되게 벽화는 한두 해 만에 색깔도 바래져 지저분해진다. 이런 수성 페인트 벽화는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과 같고, 값싼 조화에 지나지 않는다.
건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부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건물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 이것은 현재에 과거를 담고, 미래로 연결해주며, 성숙해 가는 현상이다. 건축에서 풍화는 더러워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시간의 힘으로 건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건축물 그 자체의 재료와 물성과 구축법을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다.
빛바랜 옛 사진은 생생한 고화질 사진으로 되살릴 수 있다. 그러나 옛 사진 속 실제의 시간은 첨단 기술의 조작으로 단숨에 없어져 버린다. 벽화 사업도 마찬가지다. 건물의 풍화와 시간을 지우고 페인트로 고화질의 마을과 집으로 되살린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풍화돼 빛바랜 집이라고 격하시키고, 오래된 시간을 지워버리고 물성을 무시하는 행위다. 벽화마을의 집들은 한두 해 지나 흉물로 변하고 있다. ‘너희는 건축물의 물성과 풍화의 가치를 알기나 하느냐’고 외치는 항의의 목소리 같다. 과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눈치채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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