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ㅣ'천문' 최민식은 왜 세종이 아닌 장영실을 연기했을까

입력 2020-01-01 08:41  



배우 최민식이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에 출연한 이유는 하나였다. 학교 후배이자, 동료 배우이자, 함께 미래를 그려나가는 배우 한석규와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

'천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과 관노로 태어나 종3품 대호군이 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20년간 꿈을 함께하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두 사람의 관계를 꼼꼼하게 그려내며 호평받고 있다.

최민식은 장영실 역을 맡았다. 세종 역의 한석규와는 영화 '쉬리' 이후 20년 만에 재회였다. 장승업(영화 '취화선')과 이순신(영화 '명량'), 올여름 홍범도(영화 '봉오동 전투')까지 역사적 인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생생하게 그려냈던 최민식은 이번엔 세종 앞에선 천진난만하고, 기기를 만들땐 누구보다 번뜩이는 천재성을 보였던 장영실의 모습을 그려냈다.

최민식에게 "왜 세종이 아닌 장영실 역할을 연기하게 됐냐"고 묻자 그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처음부터 장영실도 세종도 중요하지 않았다"고. 최민식에겐 한석규와 함께 하나의 작품에서 만나는 게 더 중요했다고 했다.

최민식은 한석규와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보냈다는 점에서 더욱 남다른 감정을 보였다. '국민 대배우'로 불리는 한석규를 "쫄따구"라고 칭하며 친근함과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 배우로서 어떻게 '천문'을 봤나.

항상 아쉽다. 제가 욕심이 많다. 그래도 한정된 시간에 이것저것 잘 주워담은 거 같다. 항상 시간(러닝타임)은 정해져 있고, 담아야 할 게 많아서 아쉽다.

▲ 세종과 장영실 이야기인데 영화가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감정선이 나와서 '멜로 느낌이 난다'는 말도 나왔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두 사람이다. 하나는 목표를 세운 사람, 하나는 이뤄야 하는 사람인데 그걸 이루기 위해 파생되는 감정들이 디테일하게 표현되길 바랐다. 외형적인 역사적인 프레임이 영화적으로 반복되는 건 배우로서 당기는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천문'을 통해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안여(왕의 의자)가 부서지는 사건 이후 사라진 장영실에 대해 의문을 품고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을지를 유추했다.

개인적으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과연 좋기만 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두 사람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면서 격론을 벌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유추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어디서든 만나서 격의 없이 얘기했을 거 같고. 요즘 말로 하나의 아이템으로 고민하고 대화할 수 있는데, 꼭 좋기만 했을수 있냐는 거다. 그래서 전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역동적이고 다양한 감정을 그리는 것에 집중하는 것에 의미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냈다. 미묘하면서 치열하면서 때론 서글프면서 '애증'이 섞여 있는 질투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장영실이 느끼는 질투, 간혹 선을 넘는 상상도 했다. 그런 미묘한 게 쌓이고 쌓여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 거라고.

성역화는 제 취향은 아니다. '명량' 할 때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감동 받은 건 슈퍼 히어로라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욕도 잘하고, 그런 것들이 인간적으로 와 닿았다.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하는 게 대단해 보였다.

▲ 다른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타협하고 소통하는 거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제가 연출해야 한다.(웃음) 무엇보다 감독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서브로 새로운 아이디어, 콘셉트를 던지는 거고 사령관이 수용하냐, 하지 않느냐의 부분이다.

▲ 그럼에도 배우의 역량을 믿지 않았으면 나오지 못할 장면도 많았다.

함께한 감독님, 한석규라는 배우에게 참 고맙다. 판을 깔아주고 거기서 놀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그것도 참 고도의 연출이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현해 내기 위한 중요한 재료가 배우다.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속성, 재질, 성향을 다 파악하고 있다. 이들에겐 잔소리를 하기 보단 '마음대로 놀아보아라' 하는 것이 낫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여우'다.

계속 잔소리하고 뭐라고 하는 연출가도 있다. 그러면 배우들은 뭔가 하려고 할 때 반경이 위축된다. 그런데 허진호 감독은 '일단 해보라'고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때 말하는 거고.

그리고 얘기를 많이 했다. 허구한 날 술먹으면서.(웃음) 원래 석규가 술을 한 잔도 못한다. 대학교 때도 맥주 한 잔만 먹어도 119를 불러야 하나 싶었는데, 이번엔 맥주 3잔까지 마셨다. 그래서 항상 '숨셔보라'고 점검하면서 마셨다. 이야기를 지겹게 했다. 그러다가 작품 얘기 안하고 옛날 얘기를 하곤 했다.

▲ 세종과 장영실이 항상 좋기만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거 처럼, 한석규와 좋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딱히 없었다. 대학교 때와 지금이 똑같다. 말투부터 테이프 늘어진 거 같은. (성대모사로) '그게 말이죠' 이렇게. 전 속 터지니까 '빨리 얘기하라'고 한다. 서울 토박이인데 그렇게 느리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그랬다. 제가 그래서 '어르신 나오셨냐'고 했다.

▲ 그동안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역할이 많았는데, 초반에 주눅 든 모습도 보여주고, 몸개그도 한다.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좋았다. 새로운 것을 한다는 건 항상 재밌다. 칼 없었는데 항상 카리스마 있다고.(웃음) 전 장영실의 콘셉트를 '순수'로 잡았다. 별을 바라보고, 공상을 하고, 뭔가 생각하고 만드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조금 다르지 않나. 로봇 학자 데니스홍 교수님이 강의하는 걸 TV에서 봤다. 로봇 분야 최고 권위자인데 그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하고, 열정적이고 '진짜 로봇에 미친 사람이구나' 싶었다. 장영실이 현대에 태어나면 저런 모습이구나 싶었다. 자신이 갖는 호기심을 학문적인 치열함으로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거니까. '그걸 캔다고 밥이 나와, 떡이 나와' 이럴 텐데, 장영실도 그랬을거 같았다. 정치적인 계산 안하고, 잔머리 없고, 좋으면 미쳐 버리는 거다.

▲ 외모적인 변화도 눈길을 끌더라. 동글동글한 장영실이라 더 귀여웠다.

막 살았다. 술 먹고 싶으면 술 먹고, 밥 먹고 싶으면 밥 먹고. 신체에 대해 신경 쓸 게 없어서 막 살았다. 석규도 말랐고. 굳이 살을 빼야할 이유가 없으니까. 살을 빼는 건 정말 힘들다.

▲ 이전에도 한석규와 만날 기회가 있었을까.

제가 '올드보이'를 할 때 박찬욱 감독에게 유지태 씨가 했던 역할로 한석규를 추천했다. 여차처자한 이유로 못했고. 지태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론 석규를 간절히 원했다. 아쉽긴 했다. 충무로에선 흔치 않은 제 직계 쫄따구니까.

▲ '천문'은 장영실과 세종인데, 처음부터 장영실이었나?

허진호 감독이 두 사람이 알아서 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석규한테 '너 뭐할래?'라고 물었고, '세종을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역할을) 했는데 괜찮냐'하니까 '다르게 해보고 싶다'고 해서 저는 장영실을 하기로 했다. 역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석규랑 같이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였다. 뭘 해도 같이 하고 싶었다.

▲ 한석규와 함께 한국 영화를 이끌어 왔다. 감회가 남다르지 않나.

과거에 취해 살진 않는다. 그래도 가끔 우리가 뭉쳐 촬영했던 90년대 후반, '넘버3', '쉬리' 등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다양한 색깔의 감독과 작품이 나왔다. 다시 그렇게 해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든다. 석규나 (송)강호나 '우리가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나' 하는 말도 하고. 위기의식까진 아니지만 필요성은 느낀다.

(국내 영화 산업은) 몇 개의 투자배급사가 자금을 주도하는 형태다. 그분들 입장도 이해하지만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그분들에게 신뢰를 줘야 하니까. 작지만 보는 재미가 쏠쏠한 그런 작품을 같이 개발도 하고, 적게 (투자)하고 크게 먹는 그런 작업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신인 감독들도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게. 그게 생명같다. 획일화된 작품은 죽음이다. 의미가 없다.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한다. 이제 고참이 됐으니까 우리가 해야 한다.

▲ 과거에도 스크린쿼터에 대해 강력하게 말했는데, 한 동안 작품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다 다시 산업적인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 같다.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걸 그때 느꼈다. 영화인들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 좋다 나쁘다 할 필요도 없고. 우리의 본업은 영화다. 좋은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조성하는 게 가장 좋은 일 같다. 작품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말하는 것도 호소가 있고.

▲ 임상수 감독의 '행복의 나라로'(가제), 신인 감독인 박동훈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차기작이다. 그런 고민의 연장선인가.

이야기들이 좋았다. 우리 세대의 고참들, 허진호, 임상수 이런 사람들도 계속 영화를 해야 하지 않겠나. 자꾸 끄집어내야 한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야기가 아주 영화같았다. 저와 같이하는 배우들도 아주 '쌩' 신인이다. 병아리도 되기 전인 따끈한 계란 같은. 투자사 입장에선 놀랄 수도 있다. 누군들 처음부터 잘했나. 잠재된 역량을 끄집어낸 사람이 있으니까 발휘하는 거다.

▲ 5년 전 나온 '명량'이 아직도 역대 박스오피스 1위인데, '천문'은 어떨까.

5년 전이고, 죄송한 말인데 다 잊었다. 그거 신경쓰다간 못 산다. 예매율이 열려도 영진위 사이트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도 힘들다. 물론 스코어가 좋게 나오면 기분 좋다. 안 좋을 사람이 어딨나. 그런데 거기에 연연하면 자유롭지 않다. '명량' 후에 작품 3개에 고배를 마셨다. 어떤 분은 '국밥'이라고 하더라. 하도 말아 먹는다고.

이번에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냥 성심을 다해 열심히 만들었다. 후배들한테도 술 먹을 때 그런다. '주판알 튕기지 마라'고. 그 시간에 연기한 걸 복기하라고 한다. 자유롭기 쉽지 않은데 관심 경중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 '천문'을 보면서 중년 멜로 로맨스도 가능할 거 같더라.

요즘 맨날 떠들고 다닌다. 더 나이 먹기 전에 해야 한다고. '파이란'처럼 한 번도 못 만나는 거 말고. 주야장천 만나는. 아니면 코미디도 하고 싶다. 석규가 '우리는 세 작품은 더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번에 '천문'을 했으니 다음엔 '덤앤더머', '스팅' 이런 코미디를 하고 싶다. 시사회에 온 감독들한테도 '(한석규와) 세트로 나왔으니까 빨리 만들라'고 홍보했다. 이렇게 떠들어야 감독들도 안다. 만나는 감독들마다 얘기하고 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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