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1883년에 쓴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은 ‘거짓 희망(이뤄지지 않을 희망)’이 얼마나 잔혹한 고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 ‘희망사고(思考)’를 버리지 못하면 ‘희망고문’에 사로잡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과도한 낙관론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엊그제 우리 경제를 ‘장밋빛’으로 보는 외부 전망이 나왔다. 영국 경제경영연구소(CEBR)가 세계 12위인 한국의 경제규모가 2027년 세계 10위권에 재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2050년 한국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2위에 오를 것”(골드만삭스 2007년)이란 낙관적 전망의 연장선이다. “‘통일 한국’은 노다지”라는 미국 투자자 짐 로저스의 말도 한국 경제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하지만 이런 전망들은 정확성을 담보하지 않은 숱한 예측의 일부에 불과하다. CEBR 보고서는 한국 경제의 ‘톱10’ 재진입 예상시점을 계속 늦추고 있다. 골드만삭스 보고서는 빗나간 게 더 많았고, 로저스도 2014년 ‘5년 내 한반도 통일’ 실현 시기를 계속 연기하고 있다.
외부 전문가들의 전망은 자기 일이 아니니 원래 무책임하다 치더라도 국정을 책임지는 정부·여당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도 ‘희망사고’에 사로잡혀 구체적인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희망고문’을 쏟아내고 있다. 북한 핵 폐기를 이끌어낼 것이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 미사일·핵 위협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한 간의 평화경제를 실현하면 일본을 경제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사고’를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일본을 넘어설 수 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경제가 추락해도 정부는 “경제 기초체력이 튼튼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경제회복 시점을 ‘2019년 상반기→하반기→연말→2020년’으로 계속 늦추고 있다.
‘희망고문’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고통은 더 가중될 뿐이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희망고문’을 멈추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것이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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