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화 씨 "일흔 문턱서 1억 빌려준 게 탈나…간병일 하다 '할머니 모델' 인생 2막"

입력 2020-01-05 17:17   수정 2020-01-06 02:49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힙한 할머니 모델’ 최순화 씨(77)는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초록색과 빨간색 줄무늬 모자를 쓰고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어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서울 압구정동 모델학원의 TV에선 패션쇼 무대에 선 최씨의 모습이 나왔다. 키 170㎝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워킹엔 자신감이 넘쳤다. 올해로 데뷔 3년차인 시니어 모델 최씨는 “무대에 설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며 웃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말이 있다. 모델이란 개념 자체가 국내에 없던 1950년대부터 모델을 꿈꿨던 최씨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평생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시대를 극복한 그를 지난 3일 만났다.

‘77세 요가복 모델’…젊을 적 꿈꿨지만 좌절

최씨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시니어 모델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스타 시니어 모델 김칠두 씨(65)와 지난달 ‘2020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을 받았다. 2018년 가을·겨울(FW) 시즌 패션 브랜드 키미제이(KIMMYJ) 무대로 데뷔한 후 더갱, 헤라 등 수많은 패션쇼에 섰다. 시니어 모델이 헤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건 그와 김씨가 최초다. 지난달 젊은 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요가복 브랜드 안다르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1943년생인 최씨에게 모델은 생애 첫 꿈이었다. 모델이란 단어도 모르던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들고 온 여성 잡지 ‘여원’에서 예쁜 옷을 입은 여성들의 사진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차마 모델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던 시대였다.

20세 때 언니를 따라 고향인 경남 창원에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모델이 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일하다 공무원과 결혼했고, 40년간 남매를 키우며 일을 했다. TV에 젊은 모델들이 나오는 것을 봤지만 이루지 못한 꿈은 마음속에 간직했다. 그렇게 삶이 저물어가는 듯했다.

간병일 하며 72세에 모델학원 등록

모델의 꿈을 다시 꾸게 된 건 생계 때문이었다. 68세 때 지인에게 1억원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했다.

형편이 어려워져 수년을 간병인으로 일했다. “늘그막에 왜 이런 일이 생겼나 싶었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심해 늘상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병실 TV에서 시니어 모델을 다룬 KBS 프로그램 ‘아침마당’을 봤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드레스를 입고 워킹하는 걸 보며 최씨는 반가웠다고 했다. “‘저 사람이 나를 위해 나왔구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고 생각했죠.” 바로 모델학원을 소개받아 등록했다.

당시 일흔둘이던 최씨에게 꿈은 힘든 현실을 버틸 힘이 됐다. “1주일에 하루 두 시간의 모델학원 수업이 일상을 살아낼 힘이 되더라고요. 내 생활은 무거운 짐이 한가득인데 학원에 가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어요.” 환자들이 잠든 새벽에 한 시간씩 워킹과 포즈 연습을 했고, 패션쇼에 선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끊임없이 그렸다. 옷을 직접 맞춰 입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끝에 최씨는 2018년 75세의 나이로 첫 패션쇼 무대에 섰다.

“꿈은 현실을 살아갈 힘이 됩니다”

인터뷰 도중 구두를 보여주느라 잠시 신발을 벗은 최씨의 한쪽 발바닥엔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패션쇼 무대에 서다 보니 자꾸 굳은살이 생겨 잘라냈다고 했다.

그래도 최씨는 끝까지 모델로 살아갈 작정이다. 롤모델은 미국 모델 카르멘 델로비체다. 1931년생이지만 여전히 현직 모델로 활동하는 그와 함께 세계적인 패션쇼에 서는 게 목표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든 노력하면 꿈이 이뤄진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다.

“동년배도 그렇지만 젊은 친구들도 포기하지 말고 꿈을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 끝까지 도전하면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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