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사슴을 말이라고 해서야

입력 2020-01-09 18:38   수정 2020-01-10 00:14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보면 참모나 관료들이 고생 좀 했겠다 싶다. 애써 좋게 보일 경제지표를 찾아내느라. 그래도 뭐든 자꾸 하다보면 실력이 는다. 지난해 ‘2주년 경제분야 주요 성과’ 발표자료 총 39쪽 중 37쪽을 자화자찬으로 채운 정부가 아닌가. 부실한 내용물을 가리는 포장술에 이골이 난 듯하다.

신년사에서 나열한 경제 성과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경제실상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예컨대 수출 증가율이 2017년 15.8%, 2018년 5.4%, 지난해 -10.3%로 급전직하했는데, 신년사에선 “수출 세계 7위, 3년 연속 무역 1조달러”로 화장했다. 40대·제조업 일자리가 줄고 ‘세금 알바’와 노인 일자리만 늘어난 현실도 “일자리가 뚜렷한 회복세”로 둔갑했다. ‘꿩 숨듯 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이 정부의 ‘아킬레스 건’이 된 부동산 문제는 더하다. 사방에서 ‘미친 집값’ 소리가 나와도, 작년 1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임기 대부분 기간 부동산 가격을 잡아왔고, 부동산 문제는 자신있다고 장담하고 싶다”고 호언하더니, 신년사에서는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겠다”고 한술 더 떴다. 참모들은 덩달아 “국민만 보고 가겠다”(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더 센 규제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고 거들었다. 결과가 어찌되건 안 되면 될 때까지 조일 모양이다. 여당 일각에선 서울 강남처럼 비싼 지역에 살면 세금을 물리는 ‘거주세’까지 거론한다.

누구나 물 먹은 솜 같은 경제 현실을 걱정하는데 이토록 태연한 정부가 또 있을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연상케 한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면서,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는데 경제전문가들도 이젠 두손 두발 들 지경이라고 한다.

정권 실세들의 ‘지록위마 경제관’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준비가 돼 있는 열혈 지지층을 의식한 행보일 것이다. 집권 4년차인데 아직도 경제가 나빠지면 ‘이명박근혜 정권 탓’이란 이들이 있다. 맹신에 빠지면 ‘알아야 믿는다’가 아니라 ‘믿으면 안다’가 된다.

새벽 PC 반출이 증거 인멸이 아닌 증거 보전이고 부모가 대리시험 쳐준 게 ‘오픈북’이라는 궤변이 난무하더니, 이제는 능률과 실질의 영역이어야 할 경제조차 맹목적 신앙의 대상으로 끌어들일 태세다. 정권의 언어가 ‘전쟁’ ‘사회적 패권’ 등 점점 격화되는 것도 달갑지 못하다.

권력이 아무리 사슴을 말이라고 우긴다 해도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비리 백화점인 유재수 사건을 ‘품위손상 수준의 경미한 사안’으로 치부하자, 공직사회에선 “유재수가 경미하면 앞으로 비리로 처벌받을 공무원은 없겠다”고 냉소한다. 부동산업계는 “김의겸이 투기가 아니면 ‘투기와의 전쟁’으로 폭격 맞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학부모들은 “조국 비위가 관행이면 어떤 편법도 못할 게 없다”는 반응이다. 국민은 사슴을 사슴이라고 본다.

정권은 5년으로 끝나지만 민초의 삶은 그 이후에도 한참을 더 이어간다. 지금 정부가 직시할 것은 ‘치적 포장’이 아니라 경제의 진실이다. 2.0%도 버거워진 저성장 고착화, 끝이 안 보이는 투자 감소, 일본형 디플레이션 조짐, 중국에 거의 따라잡힌 주력산업, 뒤처진 4차 산업혁명 대처, 700조원의 나랏빚 …. 어느 것 하나 전망이 밝은 게 없다.

경제위기는 포퓰리즘 배양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와 베네수엘라 차베스주의의 교훈은 ‘퍼주면 정권 유지에 이롭지만,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거 승리가 정치의 목표라고 해도 경제실상까지 감추고 왜곡하면서 표를 달라는 것은 몰염치하고 무책임하다.

세금으로 퍼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긴 쉽지만, 누군가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기득권을 자제하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부가 경제진실에 눈감고 힘겹고 인기 없는 구조개혁 대신 쉬운 길로만 가려 할 때 그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몫이 된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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