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나라가 있었다. 독특한 가치를 지녔던 해양 소국 탐라(耽羅)다. 고려 후기 삼별초 세력이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뒤따라 들어온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속지로 삼았다. 바다를 소외시킨 조선에서는 유배지로 사용되면서 기피의 땅이 됐다.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비극들은 아직 치유가 덜 됐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지 않더라도 해륙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몽골과 북만주, 랴오둥반도, 산둥반도에서 육지와 해안, 짧은 서해를 이용해 한반도에 닿은 후, 추자군도를 중간에 두고 100㎞ 정도 건너면 상륙할 수 있다. 중국의 저장성, 푸젠성에서 해류와 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흑조(구로시오)에 올라타고, 봄철에 부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해 오키나와를 거쳐 동북상하면 제주도에 닿는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의 표류 기록들에 나타나듯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中·日·삼한과 활발하게 무역
제주도에서 대마도(쓰시마섬)까지는 대략 255㎞로 멀지만, 항해 조건은 좋은 편이다. 북부의 사고 마을에 보존된 ‘오카리부네’는 제주도의 ‘테우’와 같은 종류의 뗏목이다(정공흔 설). 규슈 서쪽의 고토열도는 근대에도 뗏목을 타고 오갔을 정도로 밀접했다. 2003년 대포항을 출항한 뗏목 장보고호는 폭풍 속에서 표류했는데도 13일 만에 나루시마에 안착했다. 해발 1995m인 한라산은 시인거리가 약 160여㎞이므로, 원양 항해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동서 73㎞, 남북 41㎞에 면적이 1845㎢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주하면서 교류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동굴에서 발견된 6만5000~3만5000년 전 구석기시대 유물들은 육지를 걸어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용품이었다. 약 1만 년 전을 전후한 시기의 고산리식 토기는 만주지역·연해주·한반도·일본 열도와 연관성이 있다. 해로를 이용해 이주한 사람들의 유적이다. 기원전 3000년 이전의 유적들을 비롯해 삼양동에서는 청동기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들이 대거 발견됐다. 서귀포에는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아온 서복(서시, 서불)과 연관된 설화와 흔적들이 있다. 진나라의 항해술과 해외 정책을 고려하면 동방 개척이라는 목적도 있었으며, 제주도는 경유지나 도착지였을 가능성도 있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항로의 이해》).
역사시대에 들어오면 《삼국지》 동이전 ‘한’ 조항에 “마한의 서해상에 주호국이 있었는데…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중(中)에 와서 매매한다…”는 기록에서 국명이 처음 나타났다. 남쪽 바다에서 선박을 능숙하게 다루며 무역에 종사한 집단인 그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는 기록을 보면 삼한 사람들과는 말이 안 통하고, 독특한 풍속을 가졌을 수 있다.
주호는 남방의 물산이 필요한 한반도 소국들에 중요한 무역 상대였다. 일본 열도에는 중국계와 한반도계 상품을 공급하는 해양 물류센터였다. 산지항 유적에서는 오수전 등 18개의 한나라 화폐가 출토됐고, 애월읍과 구좌읍의 종달리 패총 등에서도 중국 화폐가 출토됐다. 대부분은 남해안의 소국들과 일본 열도의 소국들이 사용한 일종의 공용 화폐였다. 그렇다면 주호는 이 무역망의 한 거점이었음이 분명하다.
삼국 통일전쟁 때 백제와 동맹
주호국은 그 후 탐라(耽羅)·섭라(涉羅)·탐모라국(耽牟羅國) 등으로 불렸으며,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476년에는 탐라국의 이름으로 백제에 방물을 바쳤고, 은솔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백제는 탐라를 영향권에 두었기 때문에 남해동부의 가야계 세력들을 쉽게 압박했고, 안정적인 항로를 이용해 일본 열도로 편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589년에 수나라 전함이 탐라에 표착했을 때 위덕왕은 후대한 후 귀환시켰다. 또 탐라는 삼국 통일전쟁 말에 벌어진 백강전투에 백제·왜 동맹군으로 참여했다가 패전국이 됐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
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가 탐라도에 표착했을 때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잘 돌려보냈다. 하지만 778년 12차 견당선의 일부가 표류했을 때는 억류시켰다. 이를 보면 탐라는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갖고 자국의 위상을 확보한 듯하다.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隋書)》에 따르면 일본을 오고가는 사신들이 남쪽으로 제주도를 보면서 항해했다. 당나라 시대에도 일본의 사신단과 상인, 승려들은 제주도를 항로에 이용했다.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가 독특할 뿐 아니라 더욱 가치가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琉球國)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1991년 남쪽의 미야코섬(宮古島)을 조사할 때 제주도 용담동 것과 동일한 고인돌을 발견했다. 그 후 이 섬에 홍길동이 도착해 조선촌을 건설했다는 흥미로운 주장들이 나왔다(설성경 설). 고려 때인 1019년에는 탐라사람 21명이 폭풍을 맞아 털 난 사람들이 옷 벗고 사는 동남쪽섬(오키나와)에 표착했고, 1096년 표류했던 탐라사람들은 20명이 죽고 3명만 탈출했다. 조선시대 영조 땐 장한철이 오키나와 남쪽의 호산도까지 표류했고, 순조 땐 홍어 장수인 문순득이 흑산도 해역에서 오키나와까지 표착한 다음에 여송(루손), 마카오, 명나라를 경유해 조선에 귀환했다.
변방에서 진주로 빛날 가능성
반면 오키나와 지역에서 제주도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에는 귤 같은 남방 식물이 재배됐다고 기록됐고, 《탐라지》 등에 소개된 차귀당신 같은 뱀 숭배는 남방계 신앙이다. 유구국은 고려시대부터 사신단들을 파견했는데,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들어왔다. 세종 때(1429년)에는 포모가라 등 15명의 유구인들이 울진현에 표착했다. 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유구국 왕을 구하러 가던 왕세자가 폭풍우로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제주목사가 이들을 죽이고 보물을 빼앗은 일마저 있었다. 이렇게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공식·비공식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구국은 조선에 35차례의 사신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2회의 사신을 파견하는 데 그쳤다.
탐라는 해양 소국이었지만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교차로였으며, 물류망의 거점(hub)이었다. 또한 대륙문화와 해양 남방문화가 만나고, 범동아시아의 대부분 종족이 모여 발전한 문화의 심장(heart)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억눌렸던 변방의 섬이었고, 피해 의식과 쌓인 한도 적지 않았다. 이제 해양의 시대를 다시 맞이한 제주도가 탐라국의 개방성과 능동성을 회복한다면 동아시아 세계의 진주로 빛날 수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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