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년 넘는 장기 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 대통령 권한을 제한하면서 의회 권한을 크게 늘리는 게 핵심이다. 자신이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국회를 장악해 ‘실세 총리’로서 재집권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대통령 3연임을 위한 개헌이 여의치 않자 새로운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분석된다.
푸틴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연례 국정연설에서 의회에 폭넓은 권한을 부여하는 개헌을 제안했다. ‘대통령직 3연임 금지’가 주요 내용이다.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두 번 넘게 대통령직에 오를 수 없다’는 현행 조항에서 ‘계속해서’라는 표현을 삭제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면 연속 3연임을 못할 뿐만 아니라 2연임을 했다가 한 번 물러난 사람도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과거 푸틴은 2000년 임기 4년의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뒤 2연임에 성공해 8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이후 ‘계속해서 3선 금지’라는 조항에 막혀 총리로 물러났다가 2012년 임기 6년으로 바뀐 대통령직에 다시 복귀했고, 2018년 재연임에 성공해 2024년까지 임기를 남겨두고 있다. 총 20년간 대통령을 지내는 셈이다.
당초 푸틴이 개헌을 통해 3연임을 노릴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반발을 우려한 그는 후임 대통령 권한은 대폭 줄이면서 의회 권한을 강화하는 새로운 전략을 짰다.
푸틴 대통령은 “하원이 총리와 부총리, 장관 등의 임명을 인준하고 의회가 통과시킨 후보를 대통령이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또 상원에는 연방판사를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자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푸틴의 제안을 ‘종신 집권’의 야욕으로 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이뤄진 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자신을 포함한 내각 총사퇴를 전격 발표했다. ‘푸틴의 꼭두각시’로 불리는 메드베데프 총리는 최근 부패 연루 혐의 등으로 야권의 공격을 받으며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0%대까지 떨어졌다. 푸틴 대통령은 곧바로 내각 사퇴를 수용하면서 미하일 미슈스틴 연방국세청장을 하원의 동의를 거쳐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푸틴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위원회의 권한 강화도 포함돼 있다. 이를 두고 그가 퇴임 후 국가위원회 수장을 맡아 막후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예상 가능한 푸틴의 시나리오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나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최고지도자 모델을 꼽았다. 나자르바예프는 29년간 장기 집권 후 작년 3월 퇴임했지만 집권당 총재직을 유지하며 ‘인민의 지도자’라는 직함으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1997년 사망 직전까지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의 1인자 자리를 지켰다. NYT는 “장기 집권에 대한 비판과 지지율 하락 등의 위험을 의식한 푸틴은 자세한 계획은 드러내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전략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이 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리콴유는 권력을 서서히 줄여나가면서도 말년까지 국가의 ‘후견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콴유는 장기 집권 비판을 피해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방식을 택했다. 러시아 대통령실 보좌관 출신인 정치분석가 알렉세이 체스나코프는 “푸틴이 어떤 지위에 오를지 확실치는 않지만 ‘넘버원(No.1)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푸틴이 2024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에도 실권을 계속 장악해 나간다면 옛 소련을 31년간 통치한 이오시프 스탈린 전 공산당 서기장보다 긴 집권을 이어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푸틴에게 비판적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트위터에 “푸틴이 2024년에 물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천치이거나 사기꾼”이라고 썼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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