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벌을 관광 메카로 바꾼 상상력…신격호는 '최고 디벨로퍼'였다

입력 2020-01-19 17:35   수정 2020-01-2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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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화취실(去華就實: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취한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집무실에 걸려 있었던 글귀다. 그는 실제 그렇게 살았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사업 이외의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이유다. “기업인은 경영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일할 땐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대기업 총수지만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닐 때가 많았다. 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롯데백화점이나 롯데마트 같은 사업장에 들러 혼자서 둘러보고 가곤 했다.

외형을 키우기 위해 사업에 뛰어드는 것도 피했다. 잘 아는 분야, 잘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면 승부를 걸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에서 매출 100조원의 ‘롯데 왕국’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이다.

작가적 상상력을 사업으로 연결

신 명예회장을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 최고의 디벨로퍼’다.

롯데는 부동산에 대한 그의 탁월한 안목 덕에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껌, 비스킷, 초콜릿 등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식품 전문기업에 불과했다. 폭발적 성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호텔과 유통 사업을 시작했다.

신 명예회장은 원래 호텔, 유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화학, 철강 등 ‘중후장대’ 산업에 뛰어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부의 권유로 호텔 사업을 시작했다. 1970년 박정희 정부는 그에게 옛 반도호텔을 떠안겼다. 적자가 쌓인 호텔을 롯데가 맡아서 해보란 것이었다. 롯데는 옛 반도호텔 자리와 국립도서관 자리 등을 통합 개발했다. 지금의 롯데백화점 본점과 롯데호텔 서울, 롯데면세점 등이 함께 있는 서울 소공동 ‘롯데타운’이다. 롯데는 현재 이곳에서만 연간 7조~8조원의 매출을 거두고 있다.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프로젝트’도 고인의 프로젝트였다. 1981년 초반 서울 잠실에 호텔, 백화점, 실내 테마파크 등 대규모 복합시설을 짓기로 결정했다. 허허벌판이던 잠실 일대에 초대형 투자를 한다고 하자 안팎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외부 컨설팅에서도 ‘사업성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대로 시설을 해놓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온다”고 했다. 당시 임원들에게 “두고 보면 안다. 1년만 지나면 교통체증이 날 정도로 상권이 발달할 것이다. 맛있는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먼 곳에서도 달려오는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선사한다면 이곳에 오지 않을 리 없다”고 말했다.

작가의 꿈이 상상력으로

그가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좋은 것은 뛰어난 상상력 때문이란 게 롯데 안팎의 평가다. 신 명예회장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였다. 스무 살 때인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우유, 신문 배달로 끼니를 이어갈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대학 전공은 응용화학(와세다대)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문학책이었다. 틈만 나면 도쿄 간다거리의 헌책방으로 달려가 하루 종일 선 채로 문학전집을 훑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만 해도 사업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사업은 위대한 인물이나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 명예회장의 작가적 성향이 한국 최고의 디벨로퍼로 그를 성장시킨 것이다.

품질·무차입·독자…3대 경영원칙

신 명예회장은 몇 가지 경영원칙을 세워놓고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고집스럽게 ‘품질’을 중시했다. 그룹의 모태가 된 식품 사업을 벌이던 1960년대 후반 신 명예회장이 자주 한 말이 있다. “내 입에 안 맞으면 남에게도 팔지 않는다.”

‘품질 경영’이란 말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그는 ‘품질 본위’가 자신의 경영 철학이라고 당시 신문에 밝히기도 했다. 1980년대 백화점, 호텔, 테마파크 사업을 벌일 때도 같은 원칙을 따랐다.

‘무차입 경영’도 중시했다. 1970~1980년대 국내 기업들은 관행처럼 은행 돈을 빌려다가 썼다. 은행들이 너도나도 돈을 빌려주려 했기 때문이다. 롯데는 달랐다. 그는 “기업에 차입금은 우리 몸의 열과 같다. 몸에 열이 나면 병이 오고 심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 된다”고 했다. 이런 원칙 덕에 외환위기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와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롯데는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했다.

그는 해외 브랜드,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 브랜드와 기술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로열티를 주고 기술과 브랜드를 들여오면 당장 사업하는 데 편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1979년 호텔 사업을 처음 할 때도 그랬다. 힐튼, 하얏트 등 해외 유명 체인 호텔 브랜드를 가져오지 않고 ‘롯데호텔’ 독자 브랜드를 달았다. 관련 임원이 “롯데 브랜드로 호텔 사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보고하자, 신 명예회장이 “왜 비싼 로열티를 줘가며 호텔 사업을 하려 드느냐”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롯데리아, 롯데백화점, 롯데월드 등 ‘롯데’ 브랜드를 활용해 사업을 확장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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