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영화감독을 지망하던 영화과 학생이 군 전역 후 읽었던 김충식 가천대 교수의 논픽션 취재록 '남산의 부장들'은 "언젠가 꼭 내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안긴 꿈이자 목표가 됐다. 그리고 영화 '내부자들'이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직후인 2016년, 우민호 감독은 '남산의 부장들' 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남산의 부장들' 개봉을 하루 앞두고 우민호 감독을 만났다. "시사회 평이 좋다"는 말에 "대중들도 그렇게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친 우 감독은 "최대한 중립적이고 냉정하게, 끓는 피를 누르며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게 영화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원작 '남산의 부장들'은 김충식 교수가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 박정희 정부의 시작부터 암살 사건까지 18년의 통치 기간 동안 최고의 권력기간이었던 중앙정보부를 집중 취재한 취재록이다. 영화는 이 중 10.26 암살에 집중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모티브로 한 김규평(이병헌)이 박 대통령(이성민)을 암살하기 위해 총을 챙기는 것을 시작으로 40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날의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차곡차곡 서사를 쌓아간다.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지만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면서 영화적인 상상력과 자유로운 해석을 강조하면서도, '남산의 부장들' 곳곳엔 흑백 사진과 실제 사건과 관련된 설명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재규의 육성까지 선보여진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114분 러닝타임을 긴장감있게 이야기를 몰고간 우민호 감독은 "편집만 8개월 걸렸다"며 "저를 비롯해 배우, 스태프 모든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찍었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호평을 하지만,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소재 만으로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도 많더라.
언론시사회 후 평이 좋게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들도 그렇게 바라봐주실까 기대감도 있고, 떨림도 있다. 소재가 소재다보니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데, 감독인 저와 배우, 스태프는 거기에 갇히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정치적인 색이 아닌 인간 내면을 쫓으며 10.26을 조명하고 싶었다. 제 생각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덜하고 모르더라도 이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제가 그렇게 찍으려 했다.
▲ 실명은 쓰지 않았지만 각 캐릭터의 면면은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하고, 실제 사건에 대한 사진과 해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 인물 자체에 대한 리얼리티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닮았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네' 이런 감정과 내면을 들춰보고 싶었다. 사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느낀 감정은 우리가 알 수 없지 않나. 10.26 자체는 많이 알려졌지만, 그만큼 베일에 쌓인 사건이 없다. 베일에 쌓인 인물의 감정, 생각.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는지 추측할 수 있지만 해석은 다르지 않나. 전 원작을 통해 추측했고,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했다.
▲ 실제와 영화적인 상상력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정말 힘들었다. 그 줄 위에서 '이미 넘어졌나', '내가 줄 위에 있는게 맞나'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한결한결 맞춰가는데, 그 배치나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지니까 편집만 8개월을 했다.
▲ 왜 '남산의 부장들'을 영화화하고 싶었던 건가.
군 전역 후 1996년 즈음 기사가 책으로 발간된 '남산의 부장들'을 접하게 됐다. 책이 가진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실제 사진들도 수록돼 있는데 그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느와르 느낌이 나더라. 냉철하고,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이 좋았다. 이걸 영화화하고 싶었다. 생각으로만 품고 있다가 '내부자들'로 사랑을 받으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다행히 영화 판권이 안 팔린 상태였고, 원작자 분도 '내부자들'을 좋게 보셔서 선뜻 진행할 수 있었다.
▲ 원작 '남산의 부장들' 자체가 워낙 방대한 양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10.26만 뽑아 각색했다.
원작 그 자체로 3부작도 가능하겠더라. 그렇게 영화화하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찾아야 하는데, 저에겐 그게 중앙정보부가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를 폭로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종된) 파리 사건과 10.26이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원작을 보면서 중앙정보부가 깊숙히 개입했고 그 차이가 20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굉장히 놀라웠다. 호기심이 발동됐다. 왜 그랬을까. 파리 사건은 1인자를 위한 '충성'인데, 어쩌다가 '총성'으로 바뀌었을까. 그게 이 작품의 시작점이다.
▲ 배우들과 모티브가 된 캐릭터들의 싱크로율도 기가 막히다. 어디서 그런 모습을 포착한 건가.
캐스팅의 기준은 외모가 아니었다. 흔히 '잘생김을 연기한다'고 하지 않나. 전 '닮음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찾았다. 닮음을 연기해 관객들을 설득할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의 배우로 캐스팅했다. 이병헌 배우는 피부톤까지 연기해내더라. 촬영하면서 작은 모니터로 볼 땐 보지 못했던 미세한 얼굴 색의 변화가 시사회 때 큰 스크린에서 확인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이성민 배우는 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대사 톤과 뉘앙스를 표현했다. 그런 건 감독이 디렉션을 줘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건데, 감탄했다.
▲ 곽도원을 제외하곤 주요 배역 대부분 전작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들이다. 거기서 오는 시너지도 있었을 거 같다.
이병헌 배우와는 '내부자들', 이성민, 이희준, 김소진 배우와는 '마약왕'을 같이 했기 때문에 확실히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곽도원 씨와 나빴다는 건 아니다(웃음). 한 번 해본 적이 있어서 통하는 느낌이 있었고, 더 치열하게 했다. 감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아주 세밀하게 연기해야 해서 힘들었을 텐데 잘 버티면서 해줬다. 그래서 저도 버틸 수 있었다.
▲ '남산의 부장들'을 하면서 부담감이 컸나 보다.
부담감은 항상 안고 가야 하는 거고, 항상 생각한다. 전 그저 이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배우들과 스태프에게 이야기했던 약속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선입견을 깨자'는 걸 지키려 노력했다. 중립적인 시선으로 (관객들이) 어느 한 지점에 방점을 찍지 않고 오픈 시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 모든 역사물이 갖는 숙제이지만, 관객들이 모두 결말을 알고 있다. 마지막까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쪼겠다. 대통령이 암살된다는 건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도입부부터 넣고, 40일 전으로 되돌려 심경의 변화를 쫓는데 집중했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줘서 밀도감과 긴장감이 더욱 유지됐던 거 같다. 결전의 순간까지 솔직하게 다 뿜어내지 않고 줄타기를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터트리는 거다.
▲ 더 잔인하고, 선정적이고, 피 튀기게 만들수 있었을 텐데, 절제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보여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차갑고, 냉정하게 바라보려고 했다.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색도 하나하나 조절하면서 찍었다.
▲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그런가. 블랙코미디처럼 웃음이 나오는 장면도 있더라.
멋있는 게 아니라 리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규평이 박 대통령을 암살하러 가기 전 뒤뚱뒤뚱 뛰는 장면도 일부러 멋있지 않게,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찍었다. 계획은 세웠지만 그게 과연 계획대로만 갔을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군주를 잃은 신하의 느낌을 내고 싶었다. 그건 비장하거나 멋있으면 안됐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 김규평이 비오는 날 궁정동 안가에 올라가는 장면도 어찌보면 시골 선생님같고, 처량하다. 기를 쓰고 박 대통령이 경쟁자인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과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고 담치기를 하듯 올라가는데, 그 행위와 분위기로 내밀한 감정을 읽을 수 있길 바랐다.
▲ '내부자들'엔 "모히토가서 몰디브 한 잔"처럼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임자 곁엔 내가 있잖아"가 유행어가 될 거 같다.
'내부자들'은 이병헌 배우의 애드리브고, "임자"는 제가 직접 쓴 대사다. 실제로 박통의 대사 대부분은 이지민 작가와 제가 함께 새로 썼다. "마음대로 해, 임자 곁엔 내가 있잖아"는 암묵적으로 2인자에게 말할 때, 직접적이지 않으면서 지시할 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왔다. 그 결정으로 인해 문제가 된다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그런 말, 그런 느낌이 드는 1인자의 용인술이다.
▲ '내부자들'과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까지 무시무시한 영화들을 만들어 왔으면서 미국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 애청자라고.
정말 재밌지 않나. 자주 본다.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여성 캐릭터들의 직업과 고민들을 보는 게 재밌고, 몰랐던 부분 보고. 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도 정말 재밌게 봤다. 놀라웠다. 거기 음악도 너무 좋고. '아가씨' 음악을 맡았던 조영욱 음악감독님이 저희 영화도 맡아 주셨다. 제가 '아가씨'를 너무 좋아해서 레코드판을 선물해주셨는데, 요즘은 2일에 한 번씩 그걸 듣고 있다. 물론 우리 영화에서도 음악을 너무 잘해주셨다(웃음).
그래서 여자 영화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아직 실체가 나오지 않아서 언급할 단계는 아니지만 고민 중이다. '마약왕'과 '남산의 부장들'까지 쉼 없이 달려왔는데, 이번 프로모션을 마치면 당분간 쉬면서 또 '섹스 앤 더 시티'를 또 볼꺼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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