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 끝에 나온 정부의 묘수를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문제다. 우선 최근의 호르무즈 안전 항행을 위협하고 긴장 상태를 야기한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 있다. 2015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주도해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독일(P+1)이 이란과 힘들게 합의한 핵개발 평화협정 ‘공동포괄행동계획(JCPOA)’을 다른 우방국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쪽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긴장 상태에서 크고 작은 유조선 충돌이 있었지만,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이란에 의해 봉쇄될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높지 않다. 20세기 들어 호르무즈 해협이 실제로 봉쇄된 적도 없다. 그것은 원유에 국가 경제를 매달고 있는 역내 국가 모두에 재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해부대는 우리 선박의 안전 항행이라는 본래의 파병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미국이 개입하는 역내 갈등에는 거리를 두는 분명한 전략적 목표를 가져야 한다. 미국과 공동보조를 맞추는 순간 위험이 배가되는 것이 이 시각 중동 지역의 ‘비극적’ 현실이다. 걸프지역에 이해관계가 큰 유럽연합 8개국이 호르무즈 해상안전 협의체를 발표하면서도 미국과 거리를 두겠다는 선언을 이런 맥락에서 잘 짚어봐야 한다.
특히 지난 3일 미국이 3국을 공식 순방 중인 이란군 혁명수비대 최고 사령관을 표적 살해함으로써 중동지역에서 반미 정서가 근년 들어 가장 고조돼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친미 노선을 걸었던 온건 왕정 아랍 국가들조차 국제법을 무시한 미국의 행태에 두려움과 불신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 이라크 의회가 압도적인 표차로 자국 내 미군 철수를 결의함과 동시에 중동 전역에 주둔하고 있는 7만 명가량의 미군 철수 압박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미국과도 가깝고 이란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국이 미·이란 갈등에 적극적 평화중재자로 나서 호르무즈 항행 안전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중동 아랍국가들에 각인시킬 수는 없을까. 서구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리비아 등지의 참혹한 내전 상황에 파병 대신 인도적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려 그들이 당면한 기아와 질병, 실업과 민생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결단을 내릴 수는 없을까. 산유국에서 번 돈의 일부라도 부서진 박물관과 도서관, 학교, 예술회관 등을 짓는 데 기여하는 발상의 전환은 어떤가. 강대국들은 침략을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부숴버렸지만 한국이 그들의 망가진 자긍심을 복원하고 문화시설을 건설해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이미지 구축은 없을 것이다.
수천 개의 한국 기업이 중동 산유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가전, 자동차, 휴대폰, 한류 콘텐츠 등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당당하게 시장 점유율 1~2위를 달리고 있다. 스마트 도시 건설, 기술집약형 플랜트 분야에서 수천억원, 수십조원 단위의 대형 공사를 한국 기업이 수주했다는 낭보가 연이어 날아든다. 우호적인 중동 시장에 미국의 강권으로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해야 하는 우리 현실을 직시하면서 급변하는 중동에서의 균형 있는 글로벌 인식과 독자적인 전략을 다시 한번 냉정하게 가다듬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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