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전쟁이 끝난 1920년대 파리…세상에 없던 문화예술이 쏟아졌다

입력 2020-01-30 12:54   수정 2020-01-31 00:57

문화예술인에게 ‘시간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는 어디일까.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비극시인들이 활약한 고대 그리스 아테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예술적 격투’를 벌인 16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 셰익스피어의 재능이 만발한 16세기 말 영국 런던,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울려퍼진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 관심 분야에 따라 선호 지역은 제각각이겠지만 가장 많은 표를 얻을 후보지로 이들과 함께 ‘황금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프랑스 파리도 꼽힐 듯하다.

문화예술 시간여행의 장소로 파리를 택했다면 미국 역사학자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의 파리’ 시리즈 3부작 중 마지막 책인 《파리는 언제나 축제》가 여행안내서로 안성맞춤이겠다.

1920년대를 미국에서는 ‘아우성치는 20년대’, 프랑스에서는 ‘광란의 시대’라고 부른다. 1918년 말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시작돼 1929년 뉴욕 월가의 주식 폭락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황금시대’ ‘광란의 시대’뿐 아니라 ‘칵테일시대’ ‘재즈시대’ 등 다양한 별칭이 존재할 만큼 이 시기 파리는 극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매콜리프는 예술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꼽히는 1920년대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당대 인물들의 일기, 회고록, 편지 등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서술 방식으로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사진, 영화, 건축 등 예술뿐 아니라 과학, 기술, 패션, 정치, 경제의 주요 이슈들을 아우르며 파리의 모습을 연대순으로 생생하게 재현한다.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시대, 낡은 것은 가고 새로움을 갈구하던 시대에 부합하는 혁신가들이 잇달아 파리에 등장한다. 코코 샤넬과 르코르뷔지에가 대표적이다. 매콜리프에 따르면 이들의 성공은 전쟁 이후 급변한 사회를 대변한다. 코르셋 없는 티셔츠 등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샤넬의 실용적인 옷들은 패션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전쟁으로 많은 집이 파괴된 현실에 대응해 르코르뷔지에가 개발한 ‘돔-이노’ 시스템(표준화된 모듈식 주택)은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획기적 건축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만 레이, 조세핀 베이커, 콜 포터 등 전쟁 후 자신의 길을 찾아 파리에 몰려든 미국인들도 ‘빛의 도시’의 창의성과 흥겨움을 더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전통적이지 않은 분야가 점차 예술이 된 때도 이 시기다. 화가를 꿈꾸던 레이는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을 카메라로 찍다가 사진예술 개척자가 됐고, 장 르누아르는 활동사진에 푹 빠졌다가 영화예술의 거장이 된다. 녹음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모리스 라벨은 자신의 주요 작품을 생전에 녹음한 최초의 작곡가가 됐다.

매콜리프는 이 책을 2016년 발표했다. 2011년 펴낸 3부작 중 첫 권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는 1871~1900년 파리에서 활동한 클로드 모네, 에밀 졸라, 드뷔시 등 프랑스 예술가들을 다룬다. 2014년 출간한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1차 세계대전까지 피카소, 댜길레프 등 세계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3부작 한국어판은 최근 동시 출간됐다. 파리로의 시간여행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벨 에포크, 이른바 ‘아름다운 시대’의 여명기부터 시작해도 좋겠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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