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습한 동굴에 서식하는 박쥐의 몸에는 최대 200종의 바이러스가 있다. 이 때문에 전염병을 옮기는 1차 숙주로 꼽힌다. 그러나 박쥐 스스로는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특유의 면역체계 덕분이다. 박쥐는 비행할 때 체온이 40도 가까이 상승한다. 이런 고온에서는 바이러스가 잘 자라지 못한다. 대신에 백혈구 같은 체내 면역물질이 활성화된다. 감기에 걸려 체온이 올라가면 바이러스가 약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이토카인의 하나인 인터페론(당단백질)을 생성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몸에 해롭다. 박쥐는 평상시에도 이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미국국립보건원은 지난해 “사람 등 척추동물에게는 사이토카인 과다생산이 문제를 일으키지만 박쥐에게는 이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유전변이 능력이 있어 위험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의료계는 체내에 바이러스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를 밝히면 각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치료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주 과학자들은 “박쥐가 수많은 병원체에 감염되기 쉬운 환경에서 사는 게 면역 시스템의 활성화를 촉진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쥐 유전변이를 분석해 질병 치료의 단서를 찾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17년 울산과학기술원 게놈연구소는 ‘황금박쥐’로 잘 알려진 ‘붉은 박쥐’의 유전체를 규명했다. 학계는 이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암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러스의 어원은 라틴어로 ‘독(毒)’을 뜻하는 비루스(virus)다. 독과 약은 한 몸이다. 독을 이롭게 활용하면 약이 된다. 전염병의 매개로 꼽히는 박쥐가 병과 함께 약도 줄 수 있을까. 다행히 중국과 호주 연구팀이 어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홍콩대 연구팀은 백신을 개발해 임상시험에 곧 들어갈 계획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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