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골라 150분 동안 답을 써야 하는 국제 바칼로레아(IB) 역사 대입시험 기출문제다. IB는 153개국에서 도입한 국제 공인 대입시험 및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고등학생이 이런 시험문제를 풀고 있다. 언뜻 봐도 교사조차 150분 동안 답안을 쓸 엄두가 안 나는데 하물며 고등학생이 어떻게 이런 시험을 보겠느냐며, 우리 수능에 도입하기 어렵겠다는 사람이 많다. 특히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학자들조차 이런 공부는 상위권 학생에게나 가능하고 중하위권 학생에게는 수업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며 난색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미국 시카고 남동부의 조지워싱턴고등학교는 낙후 지역의 공립학교다. 다큐 촬영을 위해 제작진과 함께 방문했다. 학교 입구에는 공항에서나 보던 총기 검색대가 있었다. 이를 통과해야만 등교할 수 있다. 총기 사고가 잦은 미국이라도 모든 학교에 검색대가 있지는 않다. 그만큼 소외된 지역이다. 미국 학교는 저소득층만 무상급식을 하는데, 이 학교는 전교생의 92%가 무상급식을 받는다(전국 평균은 10%). 학부모 중 대졸자는 거의 없다. 그런 학교가 엘리트 교육이라고 인식되는 IB 교육을 도입했다. 도입 전 이 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35%였는데 지금은 70%다. 대학에 진학할 의지도, 역량도 없던 아이들이 IB 교육 도입 후 달라졌다.
이 학교 3학년인 아날리 로페즈는 사회·환경운동가가 되고 싶어 한다. 시카고에서 환경 오염이 가장 심한 곳에서 자랐다. 인근 공장에서 배출되는 화학물질로 토양의 질이 심각하게 저하되는 현상을 깊이 조사하고 IB 내신 과제를 작성했다. IB 소논문 주제는 지역별 환경 격차에 관한 것이다. 왜 어떤 특정 동네는 낙후됐는지, 결핍은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예산 지원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지역별 환경 격차를 분석했다. ‘기후 변화 및 자원위원회’를 설립해 기금을 모금하고, 환경정책 비영리 단체에서 인턴도 했다. 주 3일은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고등학교에서 IB를 처음 접하고는 너무나 놀라웠어요. IB에서는 틀려도 괜찮다는 열린 공간을 제공해 줘요. 교과 내용만 배우기보다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배워서 재미있어요. 시카고는 구역별로 사회적, 환경적 격차가 큰데 이를 해결할 정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고등학생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로페즈는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고 소신이 뚜렷했으며, 관심 분야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너무 훌륭해서 당연히 국제공인 표준화시험인 IB 성적은 최상위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페즈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 충격이었다. IB 성적이 낮아도 이렇게 훌륭한 역량을 기를 수 있다니!
또 다른 저소득층 학교인 뉴욕의 보름힐고등학교는 전교생에게 IB 교육을 적용했다. 도입 첫해에는 아무도 디플로마를 따지 못했다(디플로마는 약 50% 이상 점수면 받을 수 있는 졸업자격증 같은 것이다. 기준이 높지 않아 세계 평균 80%가 취득한다). 그러나 점수와 상관없이 토론과 프로젝트, 소논문을 거친 학생들에게 인생이 바뀌는 변화가 나타났다. 니콜 난질로토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성적이 낮고 의욕 없는 학생에게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인식이 우리 학교에도 있었어요. 하지만 상위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IB를 적용해 학생들의 눈을 뜨게 한 사례는 매우 많아요. 가장 낮은 계층, 상처받기 쉬운 학생들, 읽기도 안 되는 아이들, 평생 학교 수업에 집중해본 적 없는 아이들, 비판적 사고를 위한 질문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들, 시키는 대로만 하던 아이들, 사회로부터 단절된 아이들 모두에게 ‘생각을 꺼내는’ IB 교육은 촉매 역할을 합니다.”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 교육은 상위권 학생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교육 전체에 적용 가능하다. 성적이 낮다고 ‘내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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