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유행했던 사스는 8개월 동안 8000여 명의 감염자와 770여 명의 생명을 앗아 갔다. 아시아개발은행은 이와 관련해 세계 경제에 590억달러의 손실을 끼치고 중국의 성장률을 0.6~0.7%포인트 감소시켰다고 분석했다. 지금은 중국 경제의 특성이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피해가 가장 큰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42%에서 54%로 확대됐고, 경제 규모도 세계의 4%에서 17%로 크게 증가했다. 단순 계산으로도 그때보다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네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연 6% 성장률에 턱걸이하던 경제도 당분간 5%대를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한국도 중국 수출 비중이 18%에서 27%까지 확대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손실을 볼 수 있다.
전염병의 국제적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기경보와 선제적 방역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사태에서 얻은 교훈과 선진국의 경험을 제도화해 미래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사스 사태 이후 2015년에 다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공포가 휩쓸었을 때 필자는 전문 연구진과 함께 선진국의 감염병 대처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감염 확산을 막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초기의 엄격한 격리와 전문 의료기관의 집중관리라는 지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의료원을 운영하는 대학 총장으로서 ‘민관 합동 국가재난병원의 설립’을 제안했다. (▶본지 2015년 7월 6일자 ‘월요인터뷰’ 참조)
미국은 물론 일본,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치명적인 전염병을 국가재난병원에서 효율적으로 격리·치료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감염환자를 재난병원에 집중적으로 격리해야 분산관리의 위험과 혼란은 물론 지역 확산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재난병원은 국가가 지원하고 운영은 민간에 맡겨 의료의 질적 수준을 높게 유지하는 것이 선진국 모델이다.
당시 이 제안은 정부와 국회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어 해당 상임위원회에 법안이 상정됐다. 그러나 여야의 정치적 갈등과 북한 핵실험 등 현안에 밀려 제대로 심의되지 못한 채 19대 국회의 마감으로 폐기돼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메르스가 사라지고 국회와 정부도 새롭게 바뀌면서 재난병원 논의는 잊혔지만, 올해 다시 신종 코로나가 엄습하고 있다.
사스와 메르스, 신종 코로나 등 벌써 몇 번째인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재난이 간헐적이긴 하나 계속 기습하는데, 대응체제는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다. 그때마다 우왕좌왕하며 임기응변할 뿐 선제적 조치에 미적이고, 사태가 진정되면 그만이다. 방역행정의 컨트롤타워마저도 정치적 요인에 좌우될 때가 많고, 제대로 된 전문재난병원 하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정부는 새 학기를 앞두고 입국하는 중국 학생들을 대학이 알아서 ‘자가 격리’하고 보고하라고 한다는데, 대학이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미국은 이번에도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며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선제적으로 중국 체류 외국인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를 단행하지 않았는가.
비슷한 위험을 답습하면서도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선진화된 제도를 정착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번만이라도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미래에 대비한 선진화된 방역 시스템과 재난병원 설립 등을 제대로 추진해야 한다. 대처할 기회는 여러 번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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