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시련'이 '봉준호의 기생충' 키웠다

입력 2020-02-11 17:30   수정 2020-02-12 10:15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듯이 한국에는 충무로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각본상을 받은 한진원 작가는 수상 소감으로 충무로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한 작가는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충무로를 “나의 심장”이라고 소개했다.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계의 튼튼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기생충’이 탄생했으며 봉 감독이 오스카를 석권하는 세계적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는 의미였다.

그 토양은 봉 감독의 데뷔(2000년) 전후인 1990~2000년대에 마련됐다. 이 시기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로 불린다. 봉 감독을 비롯해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인 이창동(1997년), 홍상수(1996년), 박찬욱(2000년) 등이 모두 이때 데뷔했다. 한국영화계에 1990년대 초부터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실험적인 시도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조성된 덕분이었다. H.O.T 등 아이돌 1세대가 1996년 이후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K팝보다 먼저 K무비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영화아카데미서 유명 감독 대거 배출

1990~2000년대 충무로에는 다양한 요인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다. 국가의 전폭적 지원과 대규모 기업 자본의 유입, 뛰어난 프로듀서(제작자)와 기획영화의 등장이었다. 정부 지원은 1984년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전문기관인 한국영화아카데미(KAFA)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한국 영화사의 3분의 1이 KAFA로 인해 쓰였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KAFA가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크다. 최정봉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객원교수는 “이전까지 영화는 검열의 대상이었으나 영화진흥위에서 ‘감시’가 아니라 본격적인 ‘진흥’에 나서며 영화산업이 구조적으로 재편됐다”며 “KAFA를 통해 문화적 감각을 갖춘 감독들이 대거 배출됐다”고 설명했다.

KAFA는 장비 대여부터 실제 영화 제작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감독들을 지원했다. KAFA 출신 감독은 봉준호, 장준환, 허진호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정부는 1995년 영화진흥법을 제정해 영화 제작부터 상영, 수출 등에 대한 지원 시스템까지 구축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영화의 산업화’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전엔 기업 자본보다는 개인 자본이나 국가 지원금으로 영화가 제작됐다. 1990년대 들어 삼성영상사업단 등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진출했다. 1995년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이 세워지면서 관람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2000년대 들어 벤처 붐이 불며 벤처투자자들의 자금도 유입됐다.

돈이 돌면서 한국영화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민중 계몽에 치우친 작품을 만들거나 감독의 색깔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관객의 취향과 트렌드를 반영한 이른바 ‘기획 영화’가 나왔다. 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와 ‘미스터 맘마’ ‘투캅스’ 등이 대표적이다. 기획 영화 제작은 1999년 한국 첫 블록버스터 영화로 꼽히는 ‘쉬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당시로선 거액인 24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쉬리’는 한국영화 최초로 관객 6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영화의 상업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업성·개방성 갖춘 ‘K무비’ 탄생

한국 영화인들은 이 시기에 ‘상업성’뿐 아니라 ‘개방성’까지 갖추게 됐다. 기회는 모두가 ‘위기’라고 했던 두 번의 사건에서 찾아왔다. 1988년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기 시작하고, 1999년 한국영화 상영 비중을 보장하는 ‘스크린쿼터’가 축소된 사건이다. 한국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직배와 스크린 쿼터 축소에 격렬히 반대하며 시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고민과 결속력이 더욱 깊어진 동시에 해외 영화에 대해 개방성을 갖추게 됐다. 최 교수는 “스크린쿼터로 더욱 단결된 동시에 할리우드처럼 경쟁력을 갖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와 해외 영화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K무비’가 탄생하게 됐다.

봉 감독을 비롯해 독특한 영화적 시도를 하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기획을 도맡아 하는 전문 프로듀서들도 영화 시장에 등장했다. 차승재 전 우노필름 대표는 봉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실패했지만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관객 500만 명을 동원한 ‘살인의 추억’(2003)이 탄생할 수 있었다.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도 차 전 대표의 손을 거쳤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도 장윤현 감독의 ‘접속’,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등 흥행작을 잇달아 제작하며 명프로듀서로 이름을 얻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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