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 소국이 ‘1000년 제국’을 이룬 힘이 관용과 통합의 정신인데, 그것이 발현된 게 건축의 ‘만신전(萬神殿·판테온)’, 법에서는 ‘만민법(萬民法)’이다.
콜로세움은 쇠락했어도 로마법의 정신은 현대 법에 굳건히 남아 있다. 자연법·보편법에 기반한 법앞의 평등, 즉 ‘법의 지배(rule of law)’의 뿌리다. 법의 권위는 법을 만든 권력자들이 맨 먼저 기꺼이 지킬 때라야 생겨난다. 선진 사회는 ‘법의 지배’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의무)’가 지탱한다.
한국 사회가 겪는 아노미는 ‘법의 지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로마법 수업》의 저자 한동일 신부가 개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렵게 깨우친 로마법을 정작 국내 대학에서는 강의할 곳이 없었다. (…) 고릿적 로마법 따위는 알 필요도 없고 변호사 시험과목만 잘하면 된다는 이들도 있다.” 판·검사 변호사 법학교수가 4만 명에 육박해도 ‘법기술자’만 넘쳐나는 이유다.
대통령부터 변호사 출신이지만 우리 사회가 진정한 법치국가라고 여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명수사, 감찰 무마, 직권 남용 등 온갖 의혹이 청와대로 수렴해도 그뿐이다. 지난 반년간 나라를 뒤흔든 이들도 죄다 자칭타칭 법 전문가들이다. 외신이 영화 ‘기생충’에 빗댄 조국 사태의 주인공부터 그렇다. ‘조만대장경’이 부메랑처럼 자신을 때리는 죽비가 된 이유를 그는 돌아봤을까. 그의 찬란한(?) 어록에는 10년 전 예링의 다른 책을 소개한 고전강좌에서 “국가기관이 저지르는 불법행위가 가장 질 이 낮다”고 했던 것도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고군분투’는 안쓰러울 정도다. ‘같은 편’(민변, 참여연대)까지 공소장 비공개를 비판하는 마당에 홀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애쓴다. 진중권이 “추미애는 꼭두각시이고 복화술사는 조국”이라고 일갈해도 못 들은 체한다. 기소되고도 건재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도 변호사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20대 국회에 율사 출신 의원이 48명(16.1%)에 이른다. 5공시절 ‘육법당(육사+법대 출신)’이 ‘법조당’으로 바뀌었을 뿐, 역대 국회에서 이 비율은 15~20%를 유지한다. 여당은 민변, 야당은 전관 출신이 많다. 각 당은 입법 이해도가 높고, 유권자들이 엘리트로 여겨 많이 뽑아준 결과라고 강변한다. 4·15 총선을 앞두고 양대 정당의 영입 인재도 30% 이상이 법조인이다.
그런 국회가 로마법 정신이든 법의 지배든 제대로 알 리 없으니 의사봉을 두드리면 법이 되는 줄 안다. 법안이 2만 건씩 쌓이고, 뭘 고쳤는지도 모른 채 무더기 통과시키는 게 일상이다. 입법만능주의는 법(law)과 입법(legislation)을 구분할 줄 모르고, 법의 지배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오독한 탓이다. ‘저질 입법’을 집행하고 재판하는 행정·사법부도 하향평준화되는 게 자연스럽다.
한 세기 전 루이스 브랜다이스 미국 연방대법관은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은 법률가는 공공의 적이 되기 쉽다”고 했다. 개인과 집단 행동의 숨은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사법을 다룰 때 그 결과가 끔찍해진다는 얘기다. 이 말이 한국 사회에 절실히 와닿는 것은 그런 법기술자들이 정치까지 주도하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길을 잃은 것은 법의 근원, 역사, 철학에 대한 공부 없이 법전만 달달 외운 법기술자들이 만연한 데도 원인이 있다. 이들은 지나간 과거 일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데는 능숙하지만 나라 미래, 국가의 품격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이런 말도 했다. “가장 중요한 공직은 일반 시민이다.” 어떤 권력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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