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들은 고집했다. 아들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지휘는 3대를 잇는 업(業)이 됐다. 지난 14일 서울 발산동 코러스센터에서 ‘한국 합창계의 거목’ 윤학원 인천시립합창단 명예감독(82)과 윤의중 국립합창단 예술감독(57), 그의 아들 윤석원 씨(25)를 함께 만났다.
미국 신시내티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석원씨는 지난해 8월 군 복무를 마친 뒤 독일 유학을 준비 중이다. 아들이 음악인이 아닌 길로 가길 바랐던 윤 예술감독은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들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석원씨의 얘길 듣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무대 경험이 많지 않지만 석원씨는 “지휘가 쉬운 길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런 아들에게 윤 예술감독은 “위대한 지휘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며 “너 자신이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의 삶에서 배운 것이다. 윤 명예감독은 연세대 작곡과 재학 시절부터 기독학생합창단 지휘봉을 잡았다. 여러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나오는 합창의 매력에 푹 빠졌다. 1970년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맡아 1978년 세계합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1995~2014년 인천시립합창단을 20년간 책임지며 합창의 수준을 높이고 대중화를 이끌었다. 윤 명예감독은 “지휘자는 자기 공부도 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어루만져주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사람을, 그것도 여러 사람을 한번에 대하고 이끌어야 하는 일이라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연습실에 가면 단원들의 눈빛과 표정부터 살핀다. 손자에게도 “그런 것은 책에 나와 있지도 않고 가르쳐 줄 수도 없다”며 “스스로 경험하면서 느끼고 배워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창원시립합창단과 수원시립합창단에 이어 2017년부터 국립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윤 예술감독도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들을 아들에게 전하고 있다. 지휘 새내기 시절 아버지의 아픈 질책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그는 “공연 시작할 때 걸어나가는 것부터 마친 후 인사하는 것까지 지적했다”며 웃었다. “‘공연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긴장하기보다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는 조언도 기억이 난다”며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아버지가 유명한 지휘자고 어렸을 때부터 풍성한 음악적 토양을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한 아들에겐 부담이기도 했다. 윤 예술감독은 “악보 공부뿐만 아니라 영어도 해야 하고 피아노도 쳐야 하고, 지휘자가 되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아버지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석원씨의 부담은 더 크지 않을까. 석원씨는 “합창보다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할 생각이어서 더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하려 한다”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전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아들을 포함한 지휘 꿈나무들에게 윤 예술감독은 이렇게 조언했다. “어느 단체나 구성원의 실력은 물론 생각과 성격도 다릅니다. 이 ‘프로’들을 어떻게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그게 지휘자로서 가장 어려운 거죠. 공통분모는 무대에서 잘 연주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 방법을 제시하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지휘자가 할 일입니다.”
윤 예술감독은 다음달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국립합창단의 3·1절 101주년 기념연주회 ‘아리’를 통해 그런 무대를 보여줄 각오다. ‘아리’는 국립합창단 전임 작곡가 우효원이 만든 진혼곡으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의 ‘광야’ 등 민족저항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 소프라노 강혜정과 바리톤 김종표가 솔리스트로 나서고 한경필하모닉이 오케스트라 반주를 맡는다.
올해 일정이 빼곡한 윤 예술감독과 여전히 합창단 ‘윤학원코랄’을 이끌며 활발히 활동 중인 윤 명예감독,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휘 유망주 석원씨. 지휘자 3대가 함께하는 무대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 “2008년에 ‘아버지와 아들, 합창 배틀’ 공연을 했는데 참 재밌었어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석원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거기에 합창단이 가세해 멋진 공연을 만들어볼 수 있겠네요. 앞으로 그럴 기회가 있겠죠.”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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