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극장에 뱀을 풀던 시절의 기억

입력 2020-02-19 18:32   수정 2020-02-20 00:14

올해 한국의 문화예술저작권 수지가 역대 처음 흑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커 보인다. 더 늦어지더라도 2~3년 안에는 문화 수출이 수입을 앞지를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저작권 수지는 2000년대 들어 저작권과 콘텐츠 수출이 늘면서 꾸준히 개선돼 왔다. 2010년대 초 연간 6억~7억달러가량이던 적자는 2010년대 중반 2억~4억달러까지 줄었고 지난해에는 2억달러 미만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는 초반부터 심상치 않다. 영화 ‘기생충’ 한 편의 해외 매출만으로 벌써 작년 적자를 메우고 남을 수준이다. 여기에 다른 영상, 콘텐츠 수출 추이를 감안하면 연내 흑자 전환이 유력해 보인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개 부문 석권은 한국이 바야흐로 ‘소프트 파워’ 강국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문화산업의 싹이 발아하기 시작한 시점을 1990년대 중반으로 꼽는다. 이전까지만 해도 영화와 드라마, 음악, 만화는 ‘관리를 잘못하면 유해한’ 상품으로 취급돼 왔다. 특히 영화는 규제가 심했다. 제작과 배급 등은 허가제였고 모든 영화는 사전 검열을 받았다. 시장이 협소하고 배급망도 열악해 관객 100만 명만 끌어모아도 대박으로 평가받던 시절이다.

영화산업의 체질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 규제가 대거 풀리면서다. 1996년 영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정부 검열은 단계적으로 사라지고 대신 민간이 등급 심의를 맡았다. 영화 제작과 배급은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었다. 스타트업이 생겨나듯 청년들이 영화판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독립영화사들이 문을 열었다. 봉준호, 임순례 등 청년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정부가 합작 기준을 낮춰 해외 자본 유치가 가능해졌다. 해외 유명 배우들이 ‘난데없이’ 한국 영화에 등장하던 시기도 이즈음이다. 시장도 더 개방됐다. 1996년 지방자치단체장 재량으로 한국 영화 상영일수(스크린쿼터)를 줄일 수 있도록 했고, 1998년에는 일본 영화 수입을 허용했다.

규제가 풀리고 시장 문턱이 헐리자 기업들이 뛰어들었다. 삼성과 LG, 대우 등 주요 기업이 앞다퉈 영상단을 설립했다. 독립영화를 비디오테이프와 CD에 담아 배급하고 각종 독립영화제를 개최해 청년 영화인을 발굴했다. 이들이 장편 영화에 도전하는 시기에 기업은 직접 투자와 제작에 뛰어들었다. 삼성이 1999년 제작한 ‘쉬리’는 한국 상업 영화 수준을 진일보시킨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산업의 체질이 강화되자 은행, 보험회사 등의 금융 자본도 투자 시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8년엔 CJ가 선보인 국내 1호 멀티플렉스극장 CGV가 문을 열면서 우리나라는 투자부터 배급까지 온전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게 됐다.

최근 공유경제와 원격의료 등 일련의 혁신 산업에 대한 기득권의 반발처럼 당시 문화예술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극렬한 시위로 이 흐름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들은 “외산 영화에 밀려 우리 영화가 고사하고, 산업 자본이 시장을 망가트릴 것”이라며 불을 지르고 극장에 뱀을 풀었다. 하지만 영화에 심어진 시장경제 DNA는 결국 우리 문화를 제대로 된 산업으로 바꾸는 힘이 됐다. 정부는 규제를 더 풀어 인재를 불러모으고, 기업은 이들을 글로벌 시장으로 이끌었다. 마침내 우리가 ‘문화 수출국’ 반열에 오르는 바탕이 됐다.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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