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U 27개 회원국 정상들은 지난 20∼21일 이틀에 걸쳐 벨기에 브뤼셀에서 특별 정상회의(사진)를 열었다. 회원국 정상들은 EU의 2021년부터 2027년까지의 장기 예산안을 놓고 협상을 벌였지만 타협에 실패한 채 합의없이 회의를 끝냈다.
통상 다년도재정운용계획(MFF)으로 불리는 EU의 장기 예산안은 EU의 주요 정책과 지원 프로그램, 조직 운영 등에 쓰이는 7개년 간의 예산 계획이다.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동의와 유럽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지난달 31일 브렉시트를 계기로 발생한 재원 공백으로 EU 회원국 간 타협이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영국은 2018년 기준으로 EU 전체 예산의 11.8%에 달하는 분담금을 냈다. 독일(20.7%), 프랑스(15.5%)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다. 연간 기준으로는 100억~120억유로(약 13조700억~15조7000억원)에 달한다.
문제는 영국이 EU를 탈퇴하면서 이만큼의 분담금을 나머지 27개 회원국이 메워야 한다는 점이다. EU 회원국들이 지금까지 부담한 예산 방식대로라면 브렉시트에 따른 재원 공백은 EU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을 비롯해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이 메워야 한다. 재정 상태가 탄탄한 이들 국가는 EU의 대표적인 순기여국이다. EU로부터 받는 보조금보다 분담금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브렉시트에 따른 추가 예산을 부담할 수 없다고 밝혔다. EU 내에서 ‘프루걸(frugal·검소한) 4개국’으로 불리는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이 대표적인 반대 국가다. 이들은 EU 보조금을 받는 남부·동부유럽 국가들이 분담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EU의 이전 7개년 장기예산이었던 2014∼2020년 예산 중 4분의 3 가량이 남부·동부유럽 국가들의 지원금 및 농업 보조금 등으로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4개국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EU 예산 총규모가 EU 모든 회원국 국민총소득(GNI)의 1%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유럽의회가 제시한 1.3%는 물론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1.1%보다도 낮다. EU 예산을 사실상 축소하자는 뜻이다.
반면 EU 보조금을 받는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등 남부·동부유럽 국가들은 예산 삭감을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EU가 기후변화 대응을 최우선 정책으로 제시한 상황에서 화석연료를 주로 사용하는 동유럽 국가들은 보조금을 오히려 더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장기 예산 규모 상한선을 EU 전 회원국의 1.074%로 제안했지만 회원국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이튿날 회의에서 1.069%로 타협안을 내놨으나 모든 회원국이 또 다시 거부했다. 미셸 의장은 “불행하게도 우리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의견 차이가 아직까지 너무 커서 합의에 이를 수 없었다"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EU가 올 연말까지 장기 예산안에 합의하지 못하면 내년에 예정된 보조금 지원 등 지출 계획이 동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유럽 현지 언론들은 EU의 고질적인 갈등 중 하나인 부유한 북유럽 국가와 상대적으로 열악한 남부·동부유럽 국가의 균열이 이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표면화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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