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안전자산' 엔화의 굴욕

입력 2020-02-23 17:19   수정 2020-02-24 00:13

지금은 망하고 없어진 옛 소련이 미국과 맞섰던 냉전시대, 말보로의 힘은 대단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일수록 이 미제 담배는 ‘가벼운 뇌물’로 안성맞춤이었다. 빨간 말보로 한 갑으로 공항 통관이 수월했다는 회고담도 숱하다. 미국 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나라일수록 미화의 힘은 더 발휘됐으니 이런 역설이 없다. 지금 북한도 그렇다. ‘핵무기보다 강한 게 달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안전자산’이라고 할 때도 미국 달러가 먼저 꼽힌다. 미국과 세계 경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미국 달러(현금)냐, 미국 국채(채권)냐의 선택의 문제일 때가 많다. 금도 전통적 안전자산이다. 안전자산 개념에는 통상 유로화도 포함된다. 그다음이 일본 엔화 정도다. 안전자산 지향도 따지고 보면 경제력부터 군사·외교력까지, 총체적으로 부강한 나라로의 쏠림이다. 뒤늦은 산업화로 막대한 자금을 쌓아온 중국이 그 돈으로 미국 국채를 사들여 놓고 종종 끙끙대는 것을 보면 안전자산은 적과 경쟁국 개념도 넘어선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안전자산 대열에 들어갔던 엔화가 최근 맥을 못 추고 있다. 지난주 5거래일 동안 미국 달러 대비 2% 이상 가치가 떨어졌다. 10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안전자산 위상 흔들리는 엔화’ ‘엔의 굴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경기가 기대만큼 좋지 않고, 일본 투자자들의 이탈이 늘어난 데다, 중국 우한발(發) 전염병 확산 때문이라는 게 국제 금융계 분석이다.

엔화의 고전은 강세를 보이는 미국 달러나 금값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안전자산의 차별화 같기도 하고 ‘진짜 안전자산’이 가려지는 것 같은 분위기도 있다.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 분위기가 그만큼 강하고, 부정적 경기 전망에 따른 위기 의식도 한껏 고조됐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한국 금융시장을 보면 엔화를 걱정할 처지도 못 된다. 최근 이틀 새 원·달러 환율은 20원이나 올랐다. 주가도 급락했다. 위기가 닥치면 한국 돈 가치가 어떻게 추락하는지 전문가가 아니어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원화는 국제 위상도 아직은 멀었다. 화폐야말로 한 나라 경제의 반영이요, 국력의 상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쉽기만 하다. ‘강남 아파트’가 한국의 안전자산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때 얘기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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