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은 우리 역사에서 전란(戰亂)의 고비 때마다 등장했고, ‘민병대’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등 정정(政情)이 혼미한 국가에서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이름이 다를 뿐 두 조직은 ‘백성(민간)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비정규 군대’라는 점에서 똑같다. 공통점은 또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군대, 즉 관군(官軍)이 시원찮을 때 활동 공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관군이 국가 정규군답게 제대로 된 체계와 편제를 갖추고 임무를 다하는 곳에선 생겨날 여지가 없다. 아무리 비유법을 쓴 것이라고 해도, ‘관군’을 조련하고 발전시킬 책임을 맡은 집권당 인사들이 의병·민병대를 입에 올린 것은 그래서 부적절하다.
괜히 말꼬투리 잡아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집권한 지 3년이 다 돼가고, 그 이전 10년간의 국정 경험까지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반(反)체제 투쟁’을 하던 시절의 ‘민병대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청와대와 정부 여당 인사들의 국정 운영 행태가 그런 걱정을 키워온 터다. 외교안보(한반도 평화) 에너지(탈원전) 경제(소득주도성장) 노동(약자 보호) 등 분야마다 그럴듯한 거대담론을 내세운 정책을 밀어붙이고는, 엉뚱한 결과를 낳을 때마다 ‘남 탓’으로 책임을 떠넘겨온 게 그렇다. ‘관군’과 ‘민병대’의 가장 큰 차이는 책임감의 유무(有無)다. 국록을 먹는 관군과 달리 민병은 국민에게 빚진 것도, 책임질 일도 없다. ‘책임정치’를 책임져야 할 여당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의병’ ‘민병대’ 발언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청와대와 여당이 국정을 논의·결정·집행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를 무시하고, 배제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것도 ‘민병대 사고방식’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민병대는 본질적으로 비주류이며, 시스템이 아니라 ‘울분’과 ‘사명감’이 조직 작동의 기본 동력(動力)이다. ‘비주류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집단에서 전문가는 뒷전으로 밀려날 공산이 크다. 지금 정부와 여당이 하는 일 상당수가 그런 오류에 빠져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온 나라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날벼락’을 안긴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부터가 그렇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이 감염질환이 국내에 급속하게 확산된 첫째 원인이 ‘전문가 무시’다. 대한의사협회와 병원협회의 전문가들이 코로나19 전염 초기부터 “국내 감염을 차단하려면 중국 전역으로부터 입국을 제한해야 한다”고 숱하게 건의했지만 정부는 귀를 막았다. 정부 내 주무기관인 질병관리본부에서도 같은 건의를 했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부랴부랴 소집된 대통령 주재 ‘범의학계 전문가 초청’ 수석·보좌관회의에도 의사협회와 병원협회 관계자들은 배제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문가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특정 이념과 진영논리로 미리 정책 방향을 결정해버리는 행태가 되풀이되면서 ‘답정너(답은 정해놨으니 너는 따르기만 하라)’라는 말이 유행어로 퍼지는 지경이 됐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사회운동가 출신들이 법률을 만들고 정부 정책을 결정할 때의 위험’이라는 글에서 ‘지엽적인 목표에 대한 집착과 과학적 증거가 아닌 이념에 매몰되는 것’과 ‘확증 편향과 비합리적 몰입의 상승에 빠지는 것’을 경고한 바 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정의 엄중함을 제대로 새긴다면 일어날 리 없는 일이지만, 지금 우리 눈앞 곳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 대재앙’을 자초하고도 잘못에 눈 뜨기는커녕 ‘의병’ ‘민병대’ 타령을 읊조리는 게 그래서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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